자발적 1인가구 경조사비 누계 천만원을 넘은 것에 대하여
오 세상에, 결국 천만 원이 넘었다.
정확히는 1,130만 원. 이번주 결혼식까지 더해지면 1,140만 원이 되겠다. 성실하게 차곡차곡 모은 돈이면 좋으련만, 후후 그럴 리가. 입사 후 지금까지 경조사금으로 나간 나의 돈의 얘기다.
입사해서 서너 달 때쯤 되었을 때부터 시작했으니 기록한 지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다. 처음에 파일을 만들 때만 해도 이게 이렇게까지 금액이 커질지도 몰랐고, 또 이렇게 오래 기록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부분이 마땅히 전해야 하는 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별 뜻 없이 기계적으로 기록해 왔는데 막상 천만 원이 넘고 보니 월급개미의 작은 심장이 조금 많이 시큰거린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출을 기록하는 메모 정도로 시작했다. 누구한테 전달했는지 헷갈리기도 했고 월급을 받고 나서는 지출에도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루하루 깨닫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입사 초 월급이래 봤자 200대 초반이었고, 신용카드를 아직 사용하지 않았던 때라 예고 없는 경조사를 치르고 나면 작고 귀여운 내 가계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꼭 친분이 있지 않더라도 같은 사업부에 속한 구성원들에게는 큰 고민 없이 청첩장을 돌리던 분위기였다. 그래서 아는 선배라고는 팀 선배 밖에 없는 꼬꼬마 신입사원인 나도 예외 없이 많은 청첩장들을 받았다.
게다가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청첩장을 받으면, 자고로 센스 있는 사회인이라면 반드시 축의를 해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탓에 정말 성실히도 축의금을 냈었다. 그러다 보니 현금이 부족한 달도 생겼고 경조사가 몰리는 달에는 냈는지 안 냈는지 조차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엑셀에 경조사비를 따로 계획해 두고 실제 경조사를 챙겼을 때 나간 금액과 이름을 간단히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5년 차쯤 되었을까.
경조사 파일에는 내 연차와 비례해서 칸에 채워지는 이름과 숫자들이 점점 늘어갔다. 선배님들 결혼식뿐만 아니라 동기들의 결혼식, 상무님 부모님 장례식, 목례만 하는 그 팀장님 딸 돌잔치까지. 기록이 다양해지고 늘어나다 보니 어느 순간 분류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관계, 이름, 이벤트, 금액으로 나누어 간단한 표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대학동기/김ㅇㅇ/결혼식/100,000 같은 식이다. 이 양식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데, 모든 청첩장에 반드시 축의금으로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도 때마다 파일을 열어 칸을 채워 오게 되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그 사람이 낸 축의금이 머리 위 숫자로 보이는 기이한 일을 겪고 있는 지인이 이 파일의 존재를 알고서는
어차피 다 못 받으니까
나중에 받은 것만 잘 기억하면 돼
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회수도 못 할 돈을 왜 그렇게 계속 정리하고 있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경조사비 지출을 기록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애초에 먼 훗날 너와 내가 서로 만족할 품앗이를 위한 장부 목적도 아니었을뿐더러, 하다 보니 10년 넘게 해 오던 루틴에 가까운 일이라 갑자기 그만두기에는 그만 둘 이유가 필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돈 낼 타이밍을 마치 기다려온 사람처럼 꼬박꼬박 칸을 채워왔던 나 스스로의 뜻 모를 꾸준함이 아까운 것도 있다.
그리고 꽤 쓸모도 있는데, 이 사람에겐 얼마가 적당하지? 고민이 될 때 참고할 수 있는 유용한 기준자가 역할도 톡톡히 해주고 있다. 덕분에 나름 일관성 있게 경조사를 챙기고 있다고 생각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기록물이 되어버린 탓에, 칸에 채워진 숫자의 크기보다는 기록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는 한 두 줄의 지출 기록이지만 긴 시간 해를 더해 한데 모아보니 나름 재밌는 부분들도 보인다. 사회 초년생 때에 비해서 친분이 없는 이들의 경조사 지출은 (다행히도) 드라마틱하게 줄었고 결혼하는 이들의 평균 연령과 축의금 평균액은 올랐으며, 돌잔치는 6년 전 기록에서 갱신되지 않고 멈춰있다.
또 그때는 그 축의금이 당연했지만 지금은 소식이 닿지 않는 이들도 보이고, 어렵게 마음을 거절했던 분들의 기쁜 결혼식과 잉꼬부부였던 지인의 충격적인 두 번째 결혼식, 실수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했었던 부산에서의 장례식, 결혼식에서 돌잔치, 장례식, 졸업식까지 모든 경조사 셀에 이름이 적힌 지인도 보인다.
참 다채롭네.
문득 다들 그 나이대에 맞는 속도와 방향으로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데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큰 변화 없이 굳이 샛길로 삐져나와 천천히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샛길이 더 빨리 가는 길일 수도 있지만 나를 제외한 주변의 다수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불안해지거나 회수 가능성이 희박한 지출 장부의 SUM이 천만 원이 넘은 것을 목도하고 있노라면 그냥 생각이 평소보다 조금 깊어지는 것이다.
결혼을 굳이?라고 생각하는 다 큰 딸 셋을 가진 김여사(우리 엄마)도 슬슬 불안해지는 모양이다. 동갑내기 사촌의 결혼식을 포함해서 이번달만 해도 엄마가 참석한 결혼식이 다섯 번이었는데 다들 숙제를 끝냈는데 엄마만 숙제가 안 끝난다고 우는 소리를 했다. 그러더니
셋 중에 하나라도 좋다. 갔다가 금방 와도
되고 위장 결혼도 좋으니까 결혼식만 올려.
일 인분이라도 축의금 회수라도 해야지!
라며 제법 진심을 가득 담아 툴툴거리는 게 아닌가. 그간 딸들 결혼 안 하냐는 도돌이표 같은 아주머니들 질문에, 세상이 바뀌어서 결혼은 필수가 아니며 여자도 능력이 되면 혼자 사는 게 훨.씬. 낫다고, 다 계획이 있는 사람처럼 늘 쿨하게 답하던 엄마였는데,,, 위장결혼이라니요 어머니.
서운하고 허탈한 엄마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평생 같은 지역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부모님의 SUM에 비하면 이제 갓 천만 원을 넘긴 내 SUM은 정말 새발의 피 같겠지. 정확한 금액을 알 길은 없지만 내가 만약 엑셀에 기입된 부모님의 SUM을 본다면, 내 뺨을 스스로 철썩철썩 때리며 당장 내일이라도 시집가겠다 마음을 고쳐 먹을 만큼 적지 않은 금액이라는 것은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나도 아니고 셋 다 같은 마음이라며 결혼에 무관심하니 엄마는 속이 타들어가는 수밖에. 한편으론 엄마가 엑셀을 몰라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엄마 내가 꼭 시집가겠다고 약속을 할 순 없어. 근데 있잖아 이거(?) 그냥 삼전에 물렸다 생각하고 장투 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 있지 않을까?^,^” 라고 하면 등짝을 당연히 맞겠지?
나는 이미 글렀고 2호기, 3호기를 설득해 볼까?
오호라 본격 가족결혼사기단?
(…)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엑셀 파일의 남은 빈칸들을 채워갈 생각이다. 아직 조의금보다는 축의금이 더 많지만 밸런스가 맞춰지는 날도 언젠가는 오겠지.
엑셀에 굳이 경조사를 기록하는 것, 회수 가능 여부가 의미가 없어진 지는 오래됐지만 대신 스쳐가는 여러 인생들과 관계들을 잘 기억해 두는 방법으로서 딱 적절한 온도의 의미가 생겼다 싶다. 이렇게 된 이상 살면서 내가 얼마까지 축하와 위로를 돈으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지, 1원도 놓치지 않고 관심 있게 째려볼 생각이다.
아참, 토요일 입사동기/박OO/결혼식/10만원 잊지 말고 업데이트해야지. 메모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