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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Feb 14. 2022

시베리아 횡단열차 - 이르쿠츠크

쓸쓸한 자가 숨기 좋은 도시

[눕자마자 기절]


밤 열 시쯤 횡단열차에 탔다. 자리에 깔 수 있는 매트리스와 베개에 제공받은 커버를 씌우고 바로 누웠다. 기점역이라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타서 준비를 마쳤나 본데, 출발하기 10분 전에 겨우 기차에 탄 나는 이미 불 꺼진 열차 안에서 주섬주섬 내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할 일을 다 끝내고 주위를 보니 이미 모두가 잠들어 있었고 열차 내부의 공기도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최소한의 준비만 하는 여행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식량을 더 준비할 걸, 스푼을 준비할 걸, 커피 스틱을 더 챙겨올 걸 하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잠에서 깨보니 열차에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디서 탔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들이 탑승한 건 새벽이었으니 하바롭스크 쪽이 아니었을까싶다. 딱 한 무리와 한 사람,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스대회를 마치고 몽골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나와 같은 칸에 몸을 실은 러시아 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었다. 선뜻 대화할 마음은 들지 않았고 배는 출출했는데 다들 무언가를 먹고 있기에 나도 출발하기 전 역 앞의 마켓에서 산 감자 퓨레와 오렌지를 꺼내 먹기로 했다. (감자 퓨레는 정말 으깬 감자 맛이 나고 매우 짜다) 혼자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딱히 한 것 없는 오전... 책도 두 권 가져오고 일기 쓸 공책도 가져온 것 같은데 노트에 무언갈 적어 반복해서 읽기만했다.

오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을 무렵, 알리라는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카레스? (한국인?)

이 때부터 나는 심히 바쁜 관찰자가 될 수 있었다. 내게 관심을 보여줬으니 나도 당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힐끗 쳐다보다 눈을 마주쳐도 당당할 수 있는 명목을 알리가 내게 준 것이다.



[그의 신은 서쪽에 산다]

낮잠이든 밤잠이든 자다가 고개를 들 때면 알리는 늘 기도와 절을 하고 있었다. 기차가 달리는 방향 쪽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으니 그가 믿는 신은 아마도 서쪽 어딘가에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노보시비르스크라는 곳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왜 처음부터 비행기를 타지 않았냐고 했더니 비싸서 그렇다고 했고 가족이 있다고 했다. 함께 보낸 3일간 그가 먹은 것은 (적어도 내가 본 것 중엔) 도시락 컵라면과 싸구려 빵이 전부였다. 알리와 나눈 이 대화는 문장으로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몸짓과 단어들로 주고받은 대화다. 노보시비르스크, 비행기 모양 손가락, 패밀리, 머니… 이런 대화가 하나둘이 아니어서 문득 기차를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즐거움의 수단인 이 기차가 왜 저들에겐 간절한 삶인가. 내게도 낭만이면 다른 이에게도 낭만이었으면 좋겠는데, 적어도 내가 탄 이 기차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 같아서 문득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바이칼 호수를 보면서 함께 탄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중략)


[쓸쓸한 자가 숨기 좋은 도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한지도 이미 나흘. 비어있던 침대를 보면서 짐을 싼다. 침대가 두 개인 방을 빌렸었다. 다시는 혼자 여행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번 여행은 혼자였다. 몸이 혼자라기보단 마음이 하나였다.


이르쿠츠크는 좋은 도시다. 혼자 여행하는 이에게, 시간은 없고 거리가 필요한 이에게, 잠깐의 도망을 원하는 이에게, 이 도시는 이 모든 이들에게 과하게 대접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북한 영공을 날아 4시간이면 간다. 물가도 싸고 무엇보다 도시 전체가 묘한 쓸쓸함에 뒤덮여있으니 쓸쓸한 자가 숨기 좋다. 시베리아의 한복판에서, 추위라기엔 애매한 온도에서, 고립이라기엔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은 상태로 이번 여행을 마친 것 같다. 다음에 올 땐 또 모르지. 


안녕 이르쿠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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