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누누 Oct 04. 2020

마음만 있다면 괜찮을 거예요.

편지 왔어요. ep 3.


오늘은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편지를 씁니다. 포르투갈서  이후로 기차에서 쓰는 것은 처음이네요. 방황이 뭔지도 모르면서  방황하고 돌아가겠다는 ,  치열하게 나와 삶에 대해서 고민하겠다는 말이 담긴 편지를 집으로 보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척이나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당시엔 편지가 출사표처럼 느껴져서 자랑스러웠는걸요. 당신은 어때요, 포부와 꿈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도중에 자신감을 얻었던 적이 있었나요?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명절마다 빠짐없이 용돈이나 선물을 드리고 돌아옵니다. 제가 드리는 용돈 없이도 충분히 생활하실 걸 알지만 이 행위가 나를 어른으로 만든다는 느낌을 받아요. 키워준 이에게 보이지 않는 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뿌듯함, 사회에서 일 인분은 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 같은 것들. 저의 경우에는 삶을 놀이(혹은 연극 / play)처럼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아들, 소년, 어른, 남자친구, 회사원, 편지 쓰는 사람... 우아하게 해낼 수는 없어도 그때그때 맡은 배역이 마음에 드는 걸 보면, 역할을 소화하며 얻는 기쁨이 제겐 꽤 큰 것 같네요.


하나 변함없이 믿고 사는 건, 세상이 우리 무대인 양 살다 보면 분명 좋은 날이 와 줄 거라는 것. 주변 좋은 사람들이 입 모아 해준 말이니 의미없는 주문 같은 건 아닐 거예요. 앞으로도 여러 번 무대는 달라지겠거니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사람도 변하게 될 테지만 편지를 쓰면서 다짐해봐요. 나훈아 아저씨의 멘트처럼 세월 모가지를 비틀어 끌고 다녀야지 하구요.




명절엔 사촌 형, 누나들과 즐기던 불꽃놀이가 생생하게 떠올라요. 문방구에서 오천 원이면 몇 시간 놀기엔 충분할 만큼의 폭죽을 살 수 있었지요. 불꽃 좀 튀는 게 뭐라고, 펑펑 터지는 소리가 뭐라고 귀를 막으며 발을 동동 구르던 게 요새 말로 오지게 즐거웠거든요. 이제는 문방구도 없고 불꽃놀이를 하던 초등학교 운동장도 쉽게 들어갈 수 없지만, 명절이 오면 주머니에서 콩알 폭죽이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가끔 심지가 다 타버려도 불꽃을 쏟아내지 않는 폭죽이 있었어요. 그게 제가 가진 마지막 폭죽이어서 떠나는 길엔 자꾸만 운동장을 뒤돌아봤었고요. 조금 크다 보니 인생이 꼭 그때랑 닮았어요. 타다만 폭죽 하나 가슴에 쥐고 사는 것.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건을 기다리는 마음으로요. 그리고 그 사건은 꼭 축제 같은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도 더해서.


비좁아도 까슬한 할머니 이불 위에 구겨져 잘 수 있었고 공평한 용돈을 받으면서도 나이 많은 누나와 형들이 과자를 사주던 날들이 막내로서는 엄청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할머니도, 삼촌도, 사촌 형 누나들... 이젠 자주 볼 수 없을 사람들, 볼 수 없는 곳에 계신 분들이지만 명절만 되면 많이 보고 싶어요. 다신 그런 날들 올 리 없대도 제게 명절은 그런 거예요. 가족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그런 날.



어머니가 조금 편찮으셔서 이번 차례상을 차릴 땐 앉아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은 당신이, 삶고 졸이고 끓이는 일들은 제가 맡았습니다. 부주방장에서 주방장으로 승격한 거죠.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열 몇가지나 되는 음식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요리에는 꽤 자신이 있는 저였는데도 몇 가지는 혼자 해내지 못했습니다만 차려진 상을 보니 괜히 뿌듯하기는 했습니다. (사실 요리보다 설거지가 더 힘들었던 건 편지에만 쓰는 비밀) 이건 몇 년 전 제사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인데요.


- 마음만 있다면 이제 차례상을 차리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어? 마음만 있다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일 쯤이야… (우리 마음이 조상님들께) 잘 전달될 거야. 이젠 세상이 변하니까 우리도 변해야지.


- 우리도 다음 연휴엔 휴가를 가볼까? (뉴스를 보며) 저기 공항 봐라. 이용객이 최대란다 최대.


물론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고 오히려 어머니와 제가 더 받아들이긴 힘든 눈치지만 언젠가는 같이 떠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떠나면서도 마음만은 '우리 부모님 품어주셔서 감사해요' '이 집 아들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하는 마음들 챙겨서요.


쓸모없는 말들만 늘어놓다가 끝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지만 오늘의 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날씨가 이젠 제법 쌀쌀해졌네요. 아침과 저녁으로 몸도 마음도 잘 여미고 다니시길 바라면서.


2020. 10. 04

김민수 드림






추신: 눈 깜짝할 새에 연휴가 끝났습니다. 다음 주부턴 조금 재밌는 편지가 갈 텐데요. 편지 하나, 하나로 부족하면 둘이나 셋으로 쪼개 스페인 순례길 이야기를 해 볼 거예요. 순례길을 걸으며 썼던 다이어리를 읽어보니 편지에 쓰고 싶은 말들이 많더라고요. 확실히 몸이 극한으로 치달을 때 오히려 마음은 생각할 공간을 열어 주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그럼 다음 주에 봬요!



추신 2: 늘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심지어 글도 좋아서 (문예 창작과는 역시 좀 다른가?) 그가 쓴 말들을 함께 보냅니다. 늘 고맙습니다!


내 친구 민수가 일요일마다 편지를 쓴다.

앞으로 1년 동안 성실한 발신인이 될 예정이란다.

이건 온전히 발신자의 책임으로 이루어지는 메일이다.

메일함에 가득 쌓인 광고 사이에서 민수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민수의 일상, 민수의 여행, 민수의 마음을 엿보는 일.

나는 낯을 꽤 가리고, 말도 잘 못 놓는 편인데

민수한테는 늘 반존대를 한다. ‘오빠 잘 살아? 밥은 먹었음요?’

민수는 문장에서 우는 법이 없고

실컷 울고불고 한 뒤에 글을 쓰는 사람 같다.

민수, 민수, 1년 뒤에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게 될까나.

출처: https://www.instagram.com/p/CFtDsQHF9M-/





오늘의 편지가 좋았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래의 링크를

꾸-욱 눌러 공유해주세요.

https://www.notion.so/00aed350909947598fa08cc843b9c8c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