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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Jun 14. 2021

우리만 아는 슬픔들 <1>

슬픔의 연결

<우리만 아는 슬픔들>은 시인 김누누가 매주 홈페이지에 올리는 짧은 분량의 글입니다. 분량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글의 저작권은 저 김누누에게 있습니다.


슬픔의 연결


감정에 1부터 100까지 숫자가 있다. 그다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상태, 그러니까 아무 감정도 없는 상태를 50이라고 가정해보자. 기뻐지면 숫자가 커지고 슬퍼지면 그 만큼 숫자가 작아진다. 숫자가 작아질수록 더욱 슬픈 것이다. 숫자가 20 아래로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혼자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진다. 물론 20 아래로 떨어진 적은 몇 번 없다. 나는 언제나 45에서 55 정도의 기분을 유지한다. 55는 50보다 크기 때문에 분명 기쁜 상태이지만 60보다는 덜 기쁜 상태다. 45도 마찬가지다. 50보다 작기 때문에 분명 슬픈 상태이지만 40보다는 덜 슬픈 상태다. 내 기분은 언제나 덜한 상태를 유지한다. 덜 기쁘거나, 덜 슬프거나.


누군가 보기에 나는 언제나 여리고 슬프고 무언가 생각에 빠진 사람이며 또 누군가 보기에는 단단하고 직관적이며 기쁜 사람이다. 말하자면 코끼리 그림처럼 말이다. 어떻게 보면 코끼리 그림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이는 그림. 내 슬픔은 언제나 슬픔보다 덜 슬프고 때에 따라 슬프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덜 슬픈 사람이 슬픔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사실 할 얘기가 없다.


슬픔의 정도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어느 정도 단계의 슬픔에 이르러야 비로소 슬프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50보다 아래이면 슬픈 상태라고 했지만 50보다 아래인 것이 어느 정도 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분이 45에서 55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내 기준이다. 만일 내게 45에서 55가 어느 정도인데? 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50보다는 슬프고 40보다는 덜 슬프며 50보다는 기쁘고 60보다는 덜 슬픈 상태다. 꼭 무한도전 짝꿍 특집에서 정준하씨가 줬던 점수 같다. 그는 첫인상 평가를 점수를 주면서 해당 점수를 준 까닭을 이 점수는 너무 높고 그 점수는 너무 낮다며 그 중간 점수를 줬다.


기뻐하기에는 슬프고 슬퍼하기에는 기뻤다.


슬프다는 말을 계속하니까 조금 슬퍼진 것 같다. 슬프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말을 할수록 멀어지는 기분이다. 슬프다는 건 무엇을 가리키는 감정일까. 조금 슬퍼 혹은 너무 슬퍼, 아주 많이 슬퍼, 슬프지 않아. 조금 슬퍼와 너무 슬퍼는 얼만큼의 거리가 있는 걸까. 슬픈 것과 슬프지 않은 것에는. 슬프지 않은 것과 기쁜 것에는 또 얼만큼의 거리가 존재할까. 슬픔을 정말 내가 말한 것처럼 숫자로 표시할 수 있을까. 그럼 대화도 훨씬 편해질까? 가령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 너무 슬퍼”

“정말? 몇 정도로 슬픈데?”

“음… 지금 같은 기분이면 한 40?”

“뭐야, 지금 내 기분은 37이야 내가 3만큼 더 슬프네”

“저런… 많이 슬프겠다”


이런 대화는 너무 슬프다. 이 슬픔은 또 얼만큼의 슬픔인지 모르겠다. 내가 느끼는 슬픔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 막연한 마음. 이럴 때면 내가 어딘가로 툭 떨어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어쩌면 슬픔은 막연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마음.

하지만 그럼 저 위에 대화는 무엇 때문에 슬픈 걸까. 기분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오히려 기쁜 것 아닐까. 내가 가진 슬픔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을 텐데.


너무 모순적인 말이지만 저런 식으로 슬픔에 숫자를 매겨 높낮음을 정하는 것은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슬픔을 이해하는 걸 방해할 뿐이다. 저 대화에서 기분이 40인 사람의 슬픔은 뭉개진다. 그렇다고 37인 사람의 슬픔이 제대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40인 사람보다 3만큼 더 슬플 뿐이다. 그것은 이해도 무엇도 아니다. 결국 슬픔은 이해되지 않는다. 45에서 55의 기분도 결국 40과 60에 빗대어 설명될 뿐이다. 45가 무엇인지, 55가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다. 이 숫자들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결국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어딘가로 툭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나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엄밀히 말하면 공감 같은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딘가로 툭 떨어져 막연한 상태가 우리의 기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슬픈 사람들이다.


너무 슬픔과 조금 슬픔의 사이에는 엄청나게 많고 아주 작은 슬픔들이 있다. 37과 40 사이에 수많은 숫자들이 숨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명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덜한 사람이다. 덜 기쁘고, 덜 슬프다. 그것은 ‘너무’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사실 내게 슬픈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 없는데 어떻게 슬프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슬프기는 하다. 슬픈 일 없이 슬프다니 슬픈 일이다. 슬픈 일이 없어서 슬픈 일이 생겼다. 슬픔이 슬픔을 만들어 냈다.


나는 또한 타인이 내게 자신의 슬픔을 전할 때 슬픔을 느낀다. 이 역시 슬픔이 만들어내는 슬픔이라 할 수 있는데 타인이 내게 자신의 슬픔을 전할 때 나는 그 슬픔이 내게 전해지지 않아서 슬퍼진다. 아 정말로 정말로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툭 떨어져 막연한 상태구나. 우리는 하나도 연결되어 있지 않구나. 연결되고 싶어 내게 전하는 슬픔이 우리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더 극명히 드러내고 있구나. 나는 이런 것이 너무 슬프다. 또 슬픔이 슬픔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슬프지 않으려면 전혀 상관 없는 각자의 슬픔을 누리면서 이것이 서로 연결된 우리의 슬픔이라 믿는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내게 슬픔이란 단절되어 있음을 체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내가 느낀 슬픔이 대부분 그랬다. 친구와 사이가 틀어져 슬프거나, 애인이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슬프거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위로가 닿지 않아 슬프거나.


어린시절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아마 누군가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라고 물었고 목사님은 ‘그렇다’고 답했었다. 누군가는 이어서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럼 3일 뒤에 부활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나요?’. 목사님은 그 질문에도 ‘그렇다’고 답했다. 예배당에 앉아있는 어린이들은 궁금해졌다. 그럼 대체 예수님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지? 어린 나는 손에 못이 박히면 무척 아플 테니까, 채찍질도 아플 테고 아픈 건 무서우니까 그런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기까지 그 3일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되고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커다란 고통이라고.


이 이야기는 어쩌면 신앙고백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쩌면 신학에 박식한 사람이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슬픔의 단계를 나누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내 기분은 주로 40에서 60을 오간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당신은 알까? 나는 투명한 공 안에서 구르는 듯한 마음이다. 이 글은 앞뒤도 맞지 않고 글 안에서 반박될 만한 허약한 논리 투성이다. 분명 잘 보이고 잘 들리는데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다.


지금 내 마음은 34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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