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르 마라이 <열정>, 라벨 <볼레로>
'그런 일들은 먼훗날 비로소 다시 생각난다.
몇십년이 흘러가고, 누군가 세상을 떠난 어두운 방 안을 거닐고 있으면,
갑자기 오래 전에 사라진 말과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그 몇 마디 말이 삶의 의미를 표현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오염 없이 진실되고 변하지 않는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 관계는 어떤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우리 안에 있는 허영심과 이기심, 신의와 고결함 중에 더 힘이 센 건 어느 쪽일까요?
모든 게 무너졌다고 생각될 때 인간을 기대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요?
생애를 뒤흔들 선택의 늪을 감지했을 때 우리는 우리 운명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이 책 속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화의 형식을 빌린 사색과 통찰이 가득합니다.
이야기는 오래 전 깊은 우정을 나눴던 두 소년의 만남으로 시작됩니다.
'도움이나 희생을 바라지 않고 사리사욕 없이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것보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귀한 것은 없다.
젊은이들은 희망을 거는 사람들에게 늘 희생을 원한다.
두 친구는 뭐라 이름붙일 수 없는 은총 속에서 산다고 느꼈다.'
아주 멀리서부터 인생의 비밀과 은밀한 정열을 품고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음악이 있습니다.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라는 곡의 리듬과 멜로디가 제게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 같기도,
조심스럽지만 집요하게 미래 속으로 가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특별했던 관계가 어쩌면 비극적인 사건으로 파멸되고, 이들은 41년만에 다시 만나 묻고 답합니다.
'다 지나간 지금, 자네는 사실 삶으로 대답했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스네어 드럼의 리듬과 플룻의 독주로 시작되는 주제선율은 곡이 끝날 때까지 반복됩니다.
블록처럼 음형을 쌓고, 악기를 변주하며 마침내 장중한 피날레를 향해 걸어갑니다.
작곡가는 주제를 변주하지 않으면서, 같은 테마를 되풀이하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소리를 덧칠해 나갑니다.
색색깔의 오케스트라의 소리들의 조화를 계속해서 음미하고 싶은 곡입니다.
헝가리의 작가 산도르마라이의 <열정>이라는 소설 또한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친구가 헤어진 지 41년 만에 만나 나누는 하룻밤 동안의 대화가 소설의 거의 전부입니다.
다만 대화 속에 우리 삶의 본질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생각들이 가득합니다.
느리게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황혼에 다시 만난 두 친구들의 대화로
사건과 시간 속의 비밀들을 벗겨냅니다.
'현재의 자기와 달라지고 싶은 동경,
그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인간의 심장을 불태우는 동경은 없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세상에서 차지하는 것하고 타협할때에만 삶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일세.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타협할 줄 알고, 또 이렇게 현명하게 굴어도 삶으로부터
어떤 칭송도 받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 하네.
우리의 동경이 현세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랑하지 않아도 참을 수 밖에 없네.
배반과 신의 없음도 참아야 하고, 자기보다 인품이나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어도 참아야 하지.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일세.
여기 숲 한가운데서 일흔다섯 해 동안 나는 그런 것들을 배웠네.
그런데 자네는 이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었지.'
'볼레로'는 스페인의 무곡으로 무용가 돈 세바스찬 세레소가 고안한 춤입니다.
악센트가 강한 3박자를 사용해 현악기와 캐스터네츠의 반주로
한 쌍의 남녀가 정열적으로 추는 춤입니다.
라벨이 1928년 중순 안무가 이다 루빈시테인에게 위촉받아 작곡한 발레 음악이지만,
현대에는 연주회 리퍼토리로 더 많이 쓰입니다.
음악은 천천히 크레센도(고조)되고, 클라이막스(절정)에서 별안간 끝납니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쏟아내며 마무리되는 두 사람의 대화처럼.
악기에서 악기로,
물음과 대답이 맞물리고 대화가 끝으로 다다르면
작가는 삶에 대한 통찰을 이야기합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심드렁해졌던 마음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충동적인 날것의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싶은 마음이 아직 여기 있음을 느낍니다.
'어느 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정열은 그렇게 심오하고 잔인하고 웅장하고 비인간적인가?
그것은 사람이 아닌 그리움을 향해서만도 불타오를 수 있을까?
아니면 선하든 악하든 신비스러운 어느 한 사람만을 향해서,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정열적일 수 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f4iMjjnXbT4
*참고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Bolero> Ravel (서울시립교향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