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말러 <교향곡 5번>
'우리 가족이 서로에게 품었던 사랑, 또 끔찍한 증오, 파산과 죽음이 뒤엉킨 우리 가족 공동의 이야기,
사랑과 증오의 편린들을 끌어안고 있는 그 공동의 이야기를 내가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내 이해의 폭을 넘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 육신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어서
나는 모태에서 막 떨어져 나온 갓난아이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 이야기는 침묵이 시작되는 세계의 문턱에 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침묵뿐이고, 그것은 내 온 생애에 걸친 느릿한 작업이다.
나는 마귀 들린 아이들 앞에서, 그들과 똑같이 신비에 넋을 잃고 서 있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문학은 우리를 현실과 불분명한 느낌 사이 어딘가에 서 있도록 도와줍니다.
문장으로, 기억 속에 묻어있던 화학물질을 지금으로 꺼내와
냄새와 수증기까지 재현하는 일은 소설만이 지닌 마법같은 순간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삶에서 내 역사의 장면들을 봅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시간의 순서와 인과관계대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엔 베트남에서의 어린시절과 노년의 시간들,
프랑스로 돌아온 후의 시간들과 풍경에의 회상이 뒤섞여 묘사되어 있습니다.
뚜렷한 실체가 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흩뿌려 놓은 것처럼.
그래서 지나온 삶에 대한 내 기억의 편린과 비슷하다고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슬픔에 잠길 때면 어머니는 이륜마차에 말을 맨 다음 나를 태우고,
건기의 밤하늘을 보러 들판으로 가곤 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어머니를 소유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하늘에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폭포처럼, 침묵과 부동의 물기둥처럼 빛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는 푸르고, 손에 잡힐 듯했다.
푸른빛. 하늘은 그 반짝이는 빛으로 끊임없이 맥박 치고 웃었다.
밤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고, 눈이 닿는 곳까지 강의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을 온통 비추고 있었다.'
사랑의 끝을 확인하면서도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들이
과거와 현재,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기처럼 적힙니다.
이 특유의 형식과 문체는 뒤라스가 인생을 회상하는 방식이자 이 소설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건 죽음과 고통, 공허와 사랑의 아이러니가
우리 삶에도 존재해 우리를 늘 무언갈 찾고 꿈꾸고, 아프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SdXXmrtt9w
아주 먼 곳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회상하는 듯한 음악이 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입니다. '아주 느리게'라는 뜻입니다.
현악기들과 하프만 연주되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악장입니다.
말러가 사랑하는 알마에게 바친 헌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하프의 잔물결 위에서 바이올린이 주제선율을 연주하며 시작됩니다.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아프고 절절합니다.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마초적인 아버지 베른하르트, 만성 두통과 심장병을 앓았던 어머니 마리,
열다섯 살에 겪었던 동생의 죽음.
훗날 말러가 '나는 3중의 의미에서 고향이 없다'고 말했던 이면에는
유태인과 가톨릭, 보헤미아 태생이라는 사실 외에도 유년의 상처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이제야,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1악장부터 마지막 5악장까지 다다르는 이 교향곡이 제게는 주인공의 삶의 여정으로도 읽힙니다.
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 다섯 번째 교향곡은 자신의 인생전환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말러는 이 곡에 대해 '열정적이고 거칠고 비극적이고 엄숙하며 인간의 모든 감정으로 가득하지만,
단지 음악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질문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이전 악장들의 장면들-
처절한 장송곡과 절망의 장면들, 폭풍우가 일듯 추락하는 장면,
기괴한 무도회 같은 왈츠의 장면들을 경험한 뒤 또다시 4악장을 들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혼란 속으로 떨어지고 끊임없이 상처입으면서도
삶 안에서 불멸을 건져내고 싶어하는 마음.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연민하는 마음.
뒤라스와 말러의 뜨거운 삶의 이야기에서 나도 놓고 싶지 않은 마음들을 봅니다.
'이런 불멸성이 살아 있을 때에만, 삶은 불멸의 것이 된다.
불멸성이 삶 속에 있을 때, 그것은 길게 사느냐 짧게 사느냐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그 무엇인 것이다.
불멸성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성은 정신의 삶과 함께 시작되어 그것과 함께 끝난다고 말하는 것도 똑같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불멸성은 정신에도 관여하고 또 바람을 쫓아가는 것에도 관여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죽은 모래들,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보라.
불멸성은 거기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거기에 머물렀다가 우회한다.'
*참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김인환 옮김, 민음사
Mahler: Symphony No.5: IV. Adagietto
(1973, Deutsche Grammophon GmbH, Ber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