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속의 거울

김보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아르보 파르트 <거울 속의 거울>

by 새로운 고전

'나는 들판에 누워 별이 뜨고 지는 것을 보았어.

지구가 별바다를 흘러가는 것을 보았어.

엄청 큰 배에 타고 있다고 상상했어. 사실이기도 하고.'



https://www.youtube.com/watch?v=FgAp-KrCxM0




언젠가 미술관 안의 작은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이 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연주자들의 악보를 작게 비추는 불빛을 제외하고는 깜깜하게 암전된 공연장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내내 이름모를 낯선 행성을 떠다니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공연장에 불이 켜졌을 때는, 내가 있는 곳이 좀 더 안온하고, 또 조금 더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주로 미니멀 음악(의도적으로 리듬, 화성, 선율 등을 단순화시킨)을 기반으로

종교적 색체를 가진 음악을 많이 만들기 때문일까요,

애스토니아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의 음악은 제게 어딘가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간결하고 명상적이며, 단순하고 아름답습니다.




걸어드린 링크의 곡 <거울 속의 거울>과 함께 이 소설을 한번에 완독해보시길 권합니다.

책이 두껍지 않아 한번에 읽기가 비교적 수월하고,

우주를 유영하다가 현실로 되돌아오는 기분을 더 짙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움직이는 음들과 공중에서 떠다니는 바이올린 선율,

단순하게 반복되어서 듣는 사람만이 상상할 수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

비현실적인 차분함과 평온함을 느꼈습니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착각이 지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누가 생각나는지

아주 오래 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지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깜깜한 우주에서 거울을 보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패르트는 자신의 음악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나의 음악은 모든 색을 담고 있는 하얀 빛과 같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오로지 프리즘만 그 색들을 분리해 낼 수 있는데, 이때 이 프리즘은 바로 듣는 이의 영혼이다.'




'배에 있으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바람도 소리도 없어.

별빛은 기울어져 눈앞에 전부 쏠려 있어. 온 우주의 별이 다 한데 모여 섬광처럼 빛나.

여기 있다 보면 빛의 속도로 나를 스쳐가는 것은 온 우주고, 지구며, 내 집과 친구들이고,

나는 여기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내 시간도 서는 거라고.'




김보영 작가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편지 형식의 소설입니다.

성간 여행이 가능해진 시대에 남자와 여자는

지구 시간으로 4년 6개월 후에 있을 결혼식을 약속하고 헤어집니다.

배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며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조난당하기도 합니다.

몇 분의 시간의 오차 때문에 지구 시간으로 많은 시간을 엇갈리기도 합니다.

마치 우주에서 내게로 도착한 편지들을 읽는 듯 애틋하고 먹먹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말 그대로 우주를 가로질러 모든걸 다해 사랑하는,

비현실적이고 맹목적인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나를 만나러 올 수 없어.

우리가 무한의 강을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서 우연히 마주치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어.

이 강은 끝이 없고 노를 저어 돌아갈 수도 없어.'




'언젠가 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몇 달 살았던 적도 있다고 했었지?

이제 알 것 같아. 그건 혼자 산 것이 아니었어.

난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누군가는 내가 내놓은 쓰레기를 치워 갔고 정화조를 비워주었어.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선을 연결하고 가스를 점검하고 물통을 갈고 하수관을 청소했어.

어느 집에선가 면을 삶고 그릇에 담아 배달하고 다시 그릇을 가져가 닦았어.

나는 한 번도 혼자 살았던 적이 없어.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살 수 있단 말야?'




태양계를 여행하며 겪는 일들과 지구로 돌아와 마주하는 장면들,

언제 어디에 존재하는지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가는 여정의 문장들 사이에

간결한 3화음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율이 스미고 겹칩니다.

아르보 패르트는 초월, 자유, 갈등, 신념, 걱정, 슬픔,

우리 내면의 순간과 영원을 작고 단순한 라인에서 발견하길 원했습니다.


"나는 단 하나의 음으로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의 음, 또는 하나의 조용한 박자, 또는 하나의 소리 없는 순간들이 나를 만족시켰다.

나는 아주 제한된 소재로 작곡했다. 아주 기본적인 소재로 곡을 만들었다.

3화음으로 만든 3개의 음은 마치 종소리와 같았고

그래서 나는 이를 'tintinnabular'라고 부르기로 했다.




여러분들이 만들고 싶은, 기다리고 싶은 단 하나의 음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스물에서 스물한 살이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천 년이나 2천 년의 세월을 넘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겠지.

지나간 시간을 서러워하지 않을 거야.

사라져 가는 것들을 보며 울지 않을 거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생각할 거야.

그 애는 우리처럼 더듬거리지 않을 거야.

중력에 묶여 방황하지도 않겠지. 무한의 끝까지도 나아갈 거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것을 보게 될 거야.'





* 참고

김보영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출판사 새파란 상상

Arvo Pärt 'Spiegel im Spiegel' (거울 속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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