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여름과 루비>, 드뷔시 <영상 Ⅱ. 이베리아>
무더운 여름,
아삭하고 상쾌한 물 속에 뛰어들고 싶은 날들입니다.
이럴 땐 차가운 바람처럼 싱그러운 소리를 듣고 싶어집니다.
이 작곡가의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장들이 제 귀로 쏟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소리에 묻어있는 빛과 색깔이 밀물과 썰물처럼 일렁이며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드릴 곡을 처음 들었을 땐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의 뭉치들이
제 귀에 쏟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황홀한 흥분입니다.
반짝 빛나며 폭죽처럼 터졌다가 별똥별같이 사그라드는 것 같기도 하고,
조용히 밀려났다가 다시 차오르는 파도 같기도 합니다.
색색의 물감들이 종이 위에 한번에 떨어져 섞이는 걸 보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이 곡을 처음 듣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떤 감상을 가지실 지 궁금합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Claude Achille Debussy)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영상(Image pour orchestra)중
<이베리아(Iberia)> 입니다.
Debussy, Images for orchestra - II. Ibéria - Les Dissonances & David Grimal
총 세 악장으로 구성된 곡은 스페인의 음악과 그에 따른 우아하고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표현합니다.
1악장 <도시의 길과 시골길>은 캐스터네츠의 경쾌한 리듬으로 시작해 화려한 춤곡을 들려줍니다.
클라리넷의 멜로디를 시작으로 여러 악기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유려한 움직임과 흐름을 보입니다.
2악장 <밤의 향기>에서는 현악기의 울림 위로 오보에의 테마가 펼쳐집니다.
하바네라의 리듬이 느리게, 관능적으로 표현됩니다.
3악장 <축제의 아침>엔 현악기들의 피치카토(현을 튕겨 연주하는 기법)위에 관악기의
통통 튀는 멜로디가 신나게 들려옵니다.
드뷔시만이 가진 색채와 음색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볼륨을 높여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세밀한 소리들을 담아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때, 시간의 균일한 흐름을 깨고 돋아난 버섯처럼 사촌언니가 등장한다.
"날을 네 쪽으로 들어. 네가 뾰족한 쪽을 쥐고 드려야지."
속삭임은 은밀하다. 은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사촌언니의 사랑으로 나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때 루비가 왔다. 내가 사랑을 견디고 있을 때, 루비가 나타났다.
내 쪽으로 걸어와 그애를 밀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루비가 금기를 깼다.
나와 그애 사이에 서서 '질문'을 던졌다. 루비가 나와 그애를 떼어놓았다.
"누가 널 꼬집는데 왜 가만히 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루비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귀에 사랑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각 이동, 판의 이동처럼 사랑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박연준 시인의 첫번째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는 주인공 일곱살의 '여름'이 들려주는,
태어나 마주하는 수많은 처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첫 순간들이 쏟아지던 아프고도 황홀한 유년에 대해, 생생하게 이야기합니다.
아프고 아름답고 애틋합니다.
엄마의 존재는 모르고 아빠와 고모네 집에서 살던 일곱살 여름의 삶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첫 슬픔, 첫 기억, 첫 배신, 첫사랑.
이 소설이 묘사하는 여름에 대해,
어딘가 몽롱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서럽고 불가해한 감정에 대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빛이 일렁이고 뜨거운 고요가 흘렀다.
담벼락엔 줄장미가 늘어져 있고 나무들은 초록으로 맹렬히 무장했다.
그늘이 보이면 누구든 그늘을 향해 기어갔다.
부채와 선풍기만으로 여름의 열기를 견디어야 했다.
해가 지면 땅은 순해졌다. 불꽃의 손아귀에서 놓여난 짐승의 등처럼 땅이 천천히 식었다.
어디선가 딱, 딱, 손바닥을 쳐 모기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릴 때에도 더 어린 날을 회상했다. 옛날과 더 옛날을 구분했다.
미래는 막막했다. 미래에게선 자주 등을 돌렸다.'
'루비가 열어보았다. 단테의 <신곡>이었다.
"너, 이런 걸 읽어야 해."
"글씨가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읽어?"
"갖고 있어. 갖고 있으면 언젠가 읽겠지. 이런 걸 읽는 여자가 되어야 해."
그때, 회충이 내 뱃속에서 똬리를 틀고, 기다랗게 기지개를 펴는 것 같았다.
얼굴에 소름이 돋고 피부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 잘못 없이 한 칸 아래로 밀려난 느낌. 갑자기 쓸쓸해졌다.
복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훗날 그날의 감정이 부러움과 질투 사이에 선 감정이란 걸 알았다.
아홉 살 딸에게 <신곡>을 사다준 미옥의 얼굴,
고개를 쳐든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가르치던 엄마의 자세가 잊히지 않았다.'
이유없이 부끄럽고 왠지 모르게 심술나는 마음과
설명할 길 없이 슬픈 마음.
이름 붙이지 못했던 어린 날의 감정들이 조금 선명해집니다.
잘 알지도 대비하지도 못했던, 속수무책의 마음으로 떠나보내고 떠나온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박연준 시인의 문장은 아픔에서도 달콤한 냄새가 납니다.
'부드러운 것은 쉽게 사라진다. 첫눈, 미소, 할머니, 인생의 봄. 왔다가 금세 가는 것.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런 생각을 내가 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한다.
생각은 사건 후에 온다.
시간이 지난 후, 그때를 기억한 마음에 결정처럼 내려앉는 것.
다마네기처럼 내가 미끄러워서, 내 존재가 미끄러워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아두지 못하는 걸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렇다. 어릴 때 나는 대체로 미끄럽게 존재했다.
미끄러워서 다들 나를 타고 훌훌 내려갔다.'
드뷔시의 소리와 박연준 시인의 문장들,
모두 제게 낯설고 황홀한 처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처음은 어떤 색과 맛인지 궁금합니다.
'할머니는 나를 두고 일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어루만져서 좋아지는 게 세상에 있다는 듯이. 그 있음을 보듬는 눈빛과 손길로 나를 만졌다.
나는 할머니 손에서 다시 빚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고요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길에서만 존재의 당위를 얻었다.
그럴 땐 할머니가 나를 낳았어야 했다고. 내 엄마여야 했다고 생각했다.'
*참고
Debussy, Images for orchestra - II. Iberia
박연준, <여름과 루비>, 은행나무,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