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겹으로 펼쳐진 찰나들

구병모<파쇄>, 드뷔시<영상>

by 새로운 고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실로 오랜만에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깊어가는 숲속 밤의 주인들이 내는

다양한 색채와 질감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서로에게 호응하거나 서로를 밀어내는,

궁극적으로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소리들.

입 안이 진한 초콜릿의 향미로 가득 채워지고,

세상에서 제일 난해한 암호의 일부를 판독해낸 것만 같은

착각에 가까운 만족감과 한가로움 사이로 피로가 스며온다.

그동안 꿈속에서도 날을 세웠던 감각과 의식이,

물에 풀어지고 풀과 뒤섞여 종이죽처럼 형체를 잃고 까라지는 것을,

그녀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소설과 소설가를 소개드릴 땐 기쁘고 조바심이 납니다.

이야기 속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엿가락처럼 문장으로 늘어뜨려

한 페이지 가까이 채우기도 하고,

짧은 찰나의 순간을 긴 호흡으로 버무려 그 사이를 숨죽이고 걸어가게도 합니다.

이 작가의 문장은 길어도, 짧아도, 언제나 몰입하게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구병모 작가의 <파쇄>는 먼저 출간된 소설 <파과>의 외전 형식을 띈 단편입니다.

파과는 노인 여성 킬러인 조각의 이야기이며,

파쇄는 그녀가 어떻게 킬러가 되었는지의 외전을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펼친 순간부터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몰입해 읽었습니다.

한 장도 '문장이기만을 위한 문장'이 없는, 모든 장면과 문장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야기를 읽을 때의 기분좋음이 오랜만에 물씬 느껴졌습니다.




'챙강.

바닥에 떨어진 칼은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고,

어느새 그녀는 그의 한 손에 목이 잡힌 채로 밀쳐져 있다.

뒷머리와 등이 벽에 붙은 채로 점점 밀려 올라가고

발끝이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여,

까치발을 하고 워커 앞굽으로 버티지 않으면

그녀는 오래지 않아 철광석에 슨 녹처럼 그 자리에 부스러져 내릴 것이다.


ㅡ 한 0.5초 쯤? 망설였어. 맞지?

내가 이 새끼를 정말 찔러도 될까, 그어도 되나,

대가리를 애매하게 굴리니까 안 되는 거야.

일단 마음먹고 칼을 집었으면, 뜸 들이지 마.'




https://www.youtube.com/watch?v=UCkVbE9tnYI





이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조각이 산에서 짓는 모든 몸짓이라고 상상해봅니다.

빠른 음가의 스타카토 음형들이

아주 고요한 바람을 가르는 칼날처럼 느껴집니다.

드뷔시가 묘사한 '움직임'이라는 감각이 그녀가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교차됩니다.




드뷔시(Debussy)의 피아노모음곡 <영상> 중에서 '물의 반영'이라는 곡입니다.

리듬을 지속적인 진동으로 대체하고자 한 실험정신이 돋보입니다.

반복되는 8분음표에 겹쳐지는 셋잇단이 리듬과 속도를 쌓으며 움직임을 느끼게 합니다.

뭉텅이로 떠다니다가 꽂히는 화음의 연속이

'찰나'를 잡아 늘린듯, 중력이 없는 곳에 물방울을 흩뿌려놓은 듯 합니다.




'새벽빛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할 무렵

두 사람은 산허리를 두른 안개를 뚫고

계곡까지 가서 그날 쓸 물을 길어 온다.

한 손에 양동이를 하나씩 들고도 여러 차례 오가야 하므로,

세 번째 왕복을 즈음해서는 두 사람 모두 턱에 숨이 차올라

말과 숨이 구분되지 않고, 그녀는 특히 그가 언제 물동이를 내던지고

칼을 뽑을지 모른다는 긴장과 부담을 안고 있다.'




드뷔시는 1907년 발표한 자신의 예술적 강령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점점 더 나는 음악이 근본적으로

엄숙하거나 전통적인 형식으로 만들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리듬으로 이루어진 시간과 색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이

자신의 리듬으로 만들어내는 시간과 색채들을 위한 환기이기를 바라며,

낯설고 기분 좋은 리듬의 시간과 색채를 많이 만들어내는

가을이 되기를 바라며 보냅니다.





*참고

구병모, <파쇄>, 위즈덤하우스, 2023

Debussy 'Images' Book No.1 III. Mouvement

(드뷔시 '영상' 1권 중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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