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역사상 모든 독재자며 폭군이며 압제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념과 상관없이, 아리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아랍인이든 슬라브인이든
다른 어떤 인종이든, 대중혁명을 지지하든 상류층의 특권을 옹호하든 신의 뜻을 믿든 계엄령을 믿든,
그들은 모두 책을 가혹하게 핍박했다.
책은 아주 위험하다.
책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옛날 이야기로만 알았던
단순하고 강력한 인류 보편의 가치가 우리에게 있단 걸 확인하던 날에 대해,
그 속에서 놀랍도록 용기 있던 사람들에 대해,
수천 개 수만 개 수백만 개의 희망과 인내심과 불빛들과 살아있음에 대해,
당연해서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단어들이 눈앞에서 꿈틀대고 움직이던
지난 몇 개월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네가 용감한 거야.
용감한 사람들은 겁이 없어서가 아니야.
겁이 없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시하는 무모한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본인도 남들도 다 위험에 빠뜨리지.
내가 찾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필요한 사람은 위험을 아는 사람이야.
다리가 떨리는데도, 계속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숨이 터질 것처럼 무서운데도
세상에서 가장 작고 위험한 도서관을 맡아 지키는 디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31구역의 수용자입니다.
매일 수백 명이 죽고, 수백 명이 새로 들어오는 이곳에 어린 생명들을 가르치는
비밀스러운 학교와 도서관이 있습니다.
시체를 태운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굴뚝의 그림자 밑에서
과연 아이들에게 북극곰 이야기를 하고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게 의미가 있나?
하지만 허쉬는 그들을 설득해냈다.
그는 31구역이 아이들에게 오아시스가 될 거라고 했다.
'오아시스인가 신기루인가?'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의구심을 갖는다.
책을 버리고 목숨을 지키는 쪽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디타는 망설인다.'당장은 목숨을 구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가는 이런 상황에서
생존이란 별 대단한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인, 끝없는 공포의 날들에 빨려들어가지 않고
배우고, 생각하고, 무용한 이야기를 소중히 전하고,
더 어린 세대에게 희망을 가르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디타의 실제 모델인 '디타 크라우스'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실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929년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 가족들과
'테레지엔슈타트'라고 불렸던 유대인 게토로 보내졌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살아남은 어머니와는 다시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합니다.
신께서 아우슈비츠를 존재하게 하셨으니 어쩌면 신은 지금껏 들었던 것처럼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그런 시계공 같은 분은 아닐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가장 더러운 똥통에서 자란다.
'그러니 어쩌면 신은 시계공이 아니라 정원사인지도 모르지.'
디타는 생각한다.
신께서는 밭을 갈고 악마는 커다란 낫으로 모든 것을 잘라내 버린다.
'이 미친 게임의 승자는 누구일까?'
그녀는 자문해본다.
(소설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인 디타 크라우스 Dita Kraus)
'과거에도 지금도 2차 세계대전의 전문가라고 할 수 없는 제가 이 이야기에 이르게 된 계기는
홀로코스트 탐구가 아닌, 독서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 작가 서문 중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에너지를 마지막 한 줌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끔찍한 환경에서 신념이란 무엇인지,
호기심과 희망에 대한 욕구가 어떻게 가능한지
이 진짜를 발판 삼은 이야기가 들려줍니다.
그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작은 비밀 학교가 있었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책을 지키고 읽고 나눈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이 불타도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가치들이 있고,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순간엔 우리 모두 꺼내 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동료로서, 어떻게 함께 존엄을 지킬수 있는지를요.
오늘은 어떤 '연주'를 소개 드리려 합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입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쿨 실황 영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이 영상을 보고
확실히 다른 차원의 주파수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화면을 뚫고 나와서 꽂히는 에너지가 너무 세고 강력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걸 보면 가슴이 아플 때가 있는데요, 왜일까요?
그 마음 아픔은 슬픔과 동일한 감정일까요?
잘 모르겠지만, 부족한 설명을 붙여보자면 '상승하는 슬픔'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기운 없고 스러져가는 슬픔이 아니라, 에너지로 똘똘 뭉친 어떤 아픔, 죽음의 기운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으로 가득 찬, 눈부신 봄 날에 꽃잎들이 날리는 찰나를 볼 때의 미묘한 슬픔 같은 거요.
절정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에너지 속에도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생명이라는 건 원래부터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우리가 보고 느끼는 모든 아름다운 생명력 안에는 슬픔도 같이 들어있나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을 읽는 동안, 이 이야기가 사실인 걸 알아 너무 참혹하고 끔찍한 마음이었지만
다 타버린 폐허를 보는 마음이 아닌 까만 재 속에서도 빛나는 무언가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위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건 지난 겨울과 올해의 봄을 지나며 우리에게서 본 희망이기도 하고
이 연주를 들을 때의 사치스러운 슬픔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PJL488cfRw&t=172s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집이며, 재산이며, 존엄성을 강탈당하고 어쩌면 매우 이른 시일 내로
목숨까지 빼앗길 이 유대인들이 어째서 한 줌의 책처럼 쓸모없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매일 먹기, 폐가 숨을 거두지 않기를 바라며 목숨 부지하기가 맞을 테지요.
그러나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는 이 모든 것들, 즉 먹기, 마시기, 호흡, 맥박 등은
개인적 차원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인간이 되려면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껍데기를 깨부수고 나와야 합니다.
어머니 배 속처럼 편안한 개인의 동굴에서 나와야 비로소 타인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물론 먹고 숨 쉬며 홀로 살 수도 있을 테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더 있습니다.
바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 저자 서문 중에서
*참고
안토니오 이루트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북레시피, 2020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3 o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