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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푸리 May 07. 2020

프롤로그

부디, 모든 아이돌 덕후의 병크 없는 안전 탈덕을 기원하며...

이 글은 2017년 4월부터 현재까지 지극히 사적인 아이돌 덕질기를 담고 있다. 변변치 않은 밑천으로 K팝 아이돌 문화를 비평하자는 것도 아니고, 아이돌 덕질의 계보나 사회 문화적 의미를 파헤치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다. 단지 몇 년간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며 느낀 점을 쓴 일기에 가깝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멜 표류기> 같은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제주도라는 동방의 낯선 섬에 떨어진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그곳의 사람과 풍습을 관찰한 후 쓴 구멍 많고 편협한 기록 말이다. 그러니 다소의 오류가 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란다. 오해의 소지가 있거나 틀린 부분은 틈틈이 고칠 것이다.


‘덕질’이란 무엇일까? 2000년대 등장한 이 신조어에 대해 네이버 오픈 사전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이 행위의 핵심은 결국 시간과 돈이다. 애정을 가진 특정 대상에 대해 과도하게 시간이나 돈을 쓰는 일. 대개 이 둘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시간을 쓰다 보면 돈도 쓰고 싶어 진다. 돈을 쓰다 보면 자연히 덕질에 쓰는 시간도 늘어난다.


나로 말하자면, 애당초 덕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를테면 덕질을 하기엔 너무 제정신이다. 종종 돈과 시간과 열정을 몽땅 갈아 넣는 사람들을 보면 놀라움과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솔직히 가끔은 그들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가슴을 들뜨게 하는 대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는 만화책에 푹 빠져 살았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탐닉했으며 한 만화가의 전 작품을 섭렵하거나 계보를 줄줄 외우기도 했다. 그 또래에서 만화가를 가장 잘 알고 만화책을 많이 본 청소년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만화책인데 애장판이나 새로운 컬렉션이 출시되었다고 해서 또 산다거나, 시험공부 기간에 만화를 본다거나, 동경하는 만화 주인공을 코스프레해서 자신의 덕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건 나에게 도가 지나친 일이기 때문이다.


덕질이든 학업이든 직장 생활이든 뭐가 됐든 ‘적당히’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당하다는 건 말처럼 쉽지가 않다. 대충 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열심히 해서도 안 된다. 요리의 고수가 말하는 ‘소금은 적당히’처럼 고도의 훈련과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 섬세한 터치가 요리의 맛을 좌우하듯이 삶의 방향과 질 또한 달라진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나는 이 적당한 선을 찾는 것에 골몰했다. (언젠가 ‘적당하게 사는 법’에 대해 써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내가 덕질 중에서도 가장 하드코어 한 아이돌에 빠진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이다. 길어야 1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 인생의 비극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2017년 4월, 우연히 TV에서 한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보게 되었다. 시큰둥하게 시작된 시청은 앉은자리에서 이전 회차를 결제하게 만들었고 잠들어 있던 나의 덕질 유전자를 깨웠다. 그러니 이 덕질기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태초에 프듀가 있었다.

나 때는 말이야, 프듀라는 게 있었는데 말이야, 참 굉장했지. / 그만 좀 하세요 할머니! 그 말만 지금 50년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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