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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푸리 May 07. 2020

덕통 사고의 전말

 

태초에 프듀가 있었다. 2017년 4월 7일 첫 방송을 타고 6월 16일 종영한 이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핵폭탄급 열풍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여기서 ‘프듀’는 <프로듀스 101 시즌2>를 말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돌 덕질의 역사는 소수에서 대중으로, 음지에서 양지로 떠올랐다. 덕질은커녕 아이돌도 잘 몰랐던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아이돌 덕질에 빠졌다. 불행하게도, 그들 중 내가 있었다.


프듀에 대해선 긴 설명을 하지 않겠다. 방영 당시 매일 수백수천의 기사가 쏟아졌고 연예 잡지는 물론 시사주간지에서 특집으로 다루었으며 프듀의 사회적 현상을 분석한 논문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말로가 어떤지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프듀는 아이돌 덕질의 속성을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하게 간파한 프로그램이다. 이전에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종종 즐겨보았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꿈이 있고 재능이 있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프로그램 말이다. 구조는 거의 유사한데 감정의 온도가 전혀 달랐다. 분명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임에도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하는 서바이벌 참가자의 단골 멘트가 이전과 달리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살면서 마주칠 일 전혀 없는 타인에게 이토록 감정 이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경주마가 되어 최애 이외의 세상은 흐릿해지는 현상을 겪었다. 최애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과몰입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이돌 덕질은 과몰입을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프듀의 핵심은 ‘원픽’이다. 일단 누구든, 춤과 노래를 잘해서든, 얼굴이 자기 취향이든, 성격이 좋아 보여서든, 웃겨서든, 불쌍해서든, 어쨌든 원픽을 하면 그다음에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과몰입 상태가 된다. ‘국민 프로듀서’라는 이름 아래 내 아이돌을 내가 데뷔시킨다는 달콤한 착각, 등수가 곧 존재 이유가 되는 피라미드식 경쟁구도, 생존과 탈락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등등 프듀가 여기저기 파 놓은 함정을 피하기란 쉽지 않다. 과몰입된 국프는 곧 미래의 K팝 소비자로 진화한다. 음악 전문 방송을 표방하지만 실상은 아이돌 콘텐츠 유통망인 엠넷(Mnet)이 정체된 아이돌 시장에 소비자를 확장하기 위해 야심 차게 제작한 프로그램이 바로 프듀인 것이다.


프듀는 아이돌 덕질의 A부터 Z까지 친절하게 짚어주는 아이돌 덕질 입문 교육 방송이다. 아이돌을 그저 10대의 청소년이 좋아하는 가수나 예능 방송의 출연자로 아는 것이 전부였던 ‘머글(덕후가 아닌 일반인을 뜻하는 말)’들에게 프듀는 일주일 내내 아이돌과 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에게 하는 온라인 투표는 음악방송 투표의 예행연습이고, 협찬 물품을 받게 해주는 미션은 생일 등 각종 이벤트에 이뤄지는 선물 조공을 연상케 하며, 아이돌이 직접 촬영하는 셀프캠은 브이 라이브(V Live) 방송, 개인별 ‘직캠’(팬이 직접 찍은 무대 영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한 아이돌에게 포커싱 된 영상을 통칭한다.) 영상을 반복 재생해 조회 순위를 올리는 일련의 노동은 음원 스트리밍(스밍)의 원리와 같았다. 지하철 광고나 카페 컵 홀더 이벤트, 팬이 제작한 입덕 영상과 같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덕질 놀이가 생기기도 했다.


덕질 초심자로서 가장 아스트랄하게 느껴졌던 마보이 후원 감사 사진과 영상. 이걸 흐뭇하게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어엿한 아이돌 덕후가 된 것이다.


국프라는 새 이름의 아이돌 덕후는 매일매일 투표하고 수시로 업로드되는 영상을 초 단위로 쪼개서 보고 지하철 광고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며 프듀가 방송되는 금요일 밤을 손꼽아 기다렸다. 덕질에 쓰는 시간만큼 애정은 깊어졌고 응원을 넘어 한 몸이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과몰입은 덕질에 할애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비례했다. 지갑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우화 속 원숭이에게 신발을 판 여우처럼, 프듀를 통해 엠넷은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인다.  




아이돌의 팬이 된 걸 흔히 ‘입덕’했다고 한다. 입덕의 과정은 연애와도 같아서 사람마다 빠져드는 속도와 강도가 다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얼마 간의 ‘입덕 부정기’를 거쳤다. 팬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기간 말이다. 아이돌도 아닌 연습생을 덕질한다는 게 좀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럴 리 없다며 다잡았던 마음은 찰나의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본편도 아닌 예고편에서 나온 불과 10초 정도의 장면이었다. 그 아이가 베레모와 안경을 쓰고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상당히 귀여운 동작을 하며 봄의 햇살처럼 예쁘게 웃는데,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덕통 사고’였다. 불시에 교통사고가 나듯이, 아이돌의 팬이 되는 순간은 애초에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아이를 보고 깨달았다. 아이돌은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군계일학(群鷄一鶴), 낭중지추(囊中之錐), 어떤 자리에서도 돋보이고, 어느 순간에도 반짝거리는 사람. 그 아이가 태어난 날 부모가 ‘아들인가요, 딸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의사가 ‘아이돌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주접 글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그 아이의 최대 무기는 타고난 비주얼이었다. 눈, 코, 입이 오밀조밀 자리 잡은 얼굴은 그려 놓은 듯이 예뻤다. 트레이드마크가 된 윙크와 나에게 덕통 사고를 일으킨 바로 그 장면은 지금도 레전드 아이돌 ‘움짤(gif 형식의 그림파일)’로 남아 있다. 10대인 나이도 큰 장점이었다. 아이돌의 나이는 단순한 프로필이 아니다. 매력이자 장점이 될 수 있다. 이제 막 움튼 연둣빛의 새초롬한 새싹처럼 젊음이 뿜어내는 특유의 빛은 그 나이가 지나면 사라져 버리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면 어릴수록 많은 것이 용서되었다. 다소 부족한 춤과 노래도 어리다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찍이 아이돌로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데뷔를 못 했다면, 애석하게도 애당초 아이돌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반증이라고 여겼다.




아이돌은 유사 연애와 유사 육아의 대상이다. 연예 산업 종사자에게 팬들이 흔히 갖게 되는 연애 감정이 예상 가능한 범주라면, 유사 육아는 아이돌 덕질에 온 특이점이다. 아이돌은 영원히 자라지 않는 피터팬이자 20년의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5살인 짱구이다. 아무리 성년을 훌쩍 넘긴 나이라 해도, 심지어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도 덕후에겐 그저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다. 과도한 경쟁 구도와 미숙한 연습생이라는 신분, 그리고 30~40대로 확장된 팬층이 더해진 프듀는 진상 ‘앰(어미)’들의 소굴이었다. ‘우리 오빠’ 대신 ‘우리 아이’ 또는 ‘내 새끼’라 칭하며 유아 퇴행의 말투와 애교에 열광하고, 말실수를 하거나 눈살 찌푸릴만한 행동도 ‘우리 아이가 좀 순수해서’이며, 밤새 영상 조회수 순위를 올려주거나 지하철에 앞다투어 광고를 거는 것도 ‘우리 아이 기 죽이기 싫어서’이다. 8살 때부터 아역배우 활동을 한 최애의 과거는 유사 육아에 안성맞춤이었다. 예능 출연자, 단역 배우, 백 댄서 등 끝도 없이 발굴되는 과거의 흔적은 ‘프린세스 메이커’의 실사 버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매분 매초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곧 여기저기에 ‘덕밍 아웃’을 했다. 덕후가 되었다는 걸 주변에 알린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덕질 메이트를 만나게 되었다. 소울 메이트를 없는 인생은 있어도, 덕질 메이트 없는 덕생은 있을 수 없다. 최애의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서로 공유하고 최애의 사진이나 영상이 올라오면 온갖 주접을 나누며 지하철 광고 이벤트부터 콘서트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건 덕질 메이트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 사는 지역이 달라서 실제 만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그 시절 누구보다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다. 사진 한 장에 하루 종일 행복해하는 이 기묘한 감정은 덕질 메이트가 아니면 결코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그녀의 사생활>은 덕질 메이트가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준다. 때때로 가족보다 애인보다 심지어 최애보다 덕질 메이트가 더 소중하다.


덕생을 살며 ‘혐생’을 깨달았다. 살면서 딱히 ‘혐오스러운 인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와 닿게 될지 몰랐다. 아이돌 덕질을 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일상이 너무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다. 이따위 일과는 빨리 끝내 버리고 하루 종일 덕질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르게 보면, 나의 감정에 가장 충실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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