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질투 한 스푼, 동질감 한 스푼, 애정 열 스푼

by 채부장
25. 10. 26

박상영 작가를 좋아한다. 2019년이었던가, 국문학과 친구가 추천해 준 그의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었을 때부터 나의 애정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나오자마자 사서 하룻밤 사이에 읽어버렸고, 다이어트에 특화된 첫 에세이집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독서를 한 지도 어느덧 몇 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렇게 그는 점점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저번주였을 것이다. 우리 동네는 늘 새로운 행사와 축제를 기획하는데 이번에는 '2025 노원 몽:땅 야외도서관:낭만보장'이라는 행사가 열렸다. (노원구 축제 관계자 여러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그것도 바로 집 뒤편 경춘선 숲길에서 하는 게 아닌가. 가을이라 날도 좋겠다 가방을 챙겨 메인 무대로 향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손님, 바로 그 '박상영' 작가가 무대 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튜브에서는 몇 번 봤지만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 감개무량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풍채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빠르고 흥분된 어조로 '박상영 연대기'를 소개했다. 어린 시절 본인이 어떤 아이였는지, 어떻게 하다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는지, 회사를 다니며 글을 쓰던 시절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등단을 하고도 꽤 힘든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왔음을. '갓생의 아이콘'으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면 적어도 이 사람 이상으로는 노력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박상영 작가의 강연이 끝나고 뒤쪽 동네 서점 매대에서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구매했다. 책을 사면 직접 싸인을 받고 그와 사진도 찍을 수 있어서이긴 했지만, 실제로 아주 즐거운 독서의 경험이었다.


박상영 작가의 실물을 접하고 싸인도 받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은 박상영 작가의 짧고 긴 여행기를 담아낸 에세이집이다. 하지만 1부의 첫 이야기-스무살에 친구 Y와 떠났던 유럽 여행기-만 읽어도 이 책이 단순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건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책 전체에 박상영과 그의 친구, 동료들이 함께 한 좌충우돌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그 이야기들은 솔직하고 사랑스러우며 생동감이 넘친다. 지금은 지나가버려서 더 그리운, 인생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에서의 첫날 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최저가의 방을 예약한 우리는 무려 30명이 한방을 쓰는 도미토리에서 잤다. 완벽히 불협화음인 오케스트라의 협주를 듣는 것처럼 전 세계 사람들의 다채로운 코골이를 들으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잠귀가 몹시 밝고 예민한 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23)


22살,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가서 학기를 마치고 한 달 반의 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다. 부모님의 돈으로 여행을 해야 하니 아무래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박상영 작가의 영국 여행처럼 그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숙소는 남여가 함께 투숙하는 대형 도미토리 게스트하우스 정도였다. 다양한 인종의 여행자들과 함께 방을 공유하며 이층 침대에서 잠을 청하던 그 시절이 이토록 생생하게 떠오를 줄이야. 지금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할텐데, 글을 읽으며 그 당시를 떠올리니 입가에 비죽이 미소가 지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박상영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와 비슷해서인 것 같다. 물론 그는 나를 알지도 못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동질감이 느껴진다. 일단 우리는 나이가 같고, 그래서 나 혼자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이나 배경을 보면 같은 시대를 걸어왔음이 분명하다. 글을 읽어보면 묘하게 성격도 비슷한 것 같다. 겁이 많고 소심하지만 열망이 크고, 때때로 자괴감이나 열등감에 빠지고, 슬럼프를 겪으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애정이 큰 만큼 쉽게 상처를 받고 오래 곱씹는다. 박상영의 글을 읽으면 그의 상처와 아픔, 소위 말하는 '구린' 점과 멋진 점까지도 모두 알 수 있다. 최근에 어떤 친구가 나에게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글을 읽다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사실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사실 나는 어릴 적부터 글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따금 학교 백일장이나 토론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기에, 대학을 진학할 때도 막연히 글을 쓰고 말하는 직업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갓 스무 살이 된 내가 알고 있는, 글 쓰고 말하는 직업이라고 해 봤자 언론인이 거의 전부였다. 때문에 별 고민 없이 복수전공으로 신문방송학을 선택했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그리고 글쓰기에 관련된 전공)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름지기 작가라는 것은 뭔가 특별하고 조금은 이상하기까지 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기행에 가까운)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닿기에는 너무 먼 영역인 것만 같았다." (p.230)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 국문학을 복수 전공한 나로서는 정말 공감하는 부분이다. 유년 시절에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아주 조금 잘하는 게 있다면 글을 쓰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말이다. 나 역시 기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전공을 정했고(어떻게 하다보니 홈쇼핑PD의 길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글 쓰기와 말하기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지만 박상영 작가와 다른 점은 '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 그래서 그만큼 긴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생업의 길로 뛰어들었다는 데 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내 욕망은 얼마나 큰 걸까. 아직도 그 크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여행을 다니는 내 모습은, 삶을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여행을 떠나올 때마다 나는 일상으로부터 도피를 꿈꾼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여행을 하는 중에 나는 가장 열렬히 일상에 대해 생각한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일상의 장소들과 내 삶에 연루된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 그들이 내게 주었던 어떤 따뜻함이나, 깨달음에 대해서도. 물음표와 느낌표, 말줄임표만이 가득한 내 삶에서 유일하게 쉼표를 가능하게 해주는 건 나의 친구들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고 맛있는 음식이나 나눠 먹는 그런 존재들 말이다." (p. 283)


상영의 대학 친구들인 조하나, 김종미, M은 책에 세 번이나 등장한다. 첫 번째는 박상영 작가가 가파도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생활할 때, 두 번째는 여행 프로그램을 위해 강원도 영월 '운탄고도'를 방문했을 때, 마지막은 네 친구가 다시 의기투합해 떠난 여수와 남해 여행에서다. 작가가 계획형 인간이라고 설명한 조하나, 긍정적이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운 M, 운전을 도맡아 하는 친구 김종미까지. 각기 다른 성향의 친구들이 모여 시시콜콜한 수다로 채워가는 여행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무래도 나의 대학 친구들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기적으로 함께 여행하는 모임이 있다. 우리끼리는 '오일장'이라 부르는데, 말 그대로 다섯 명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대학에서 같은 전공을 마쳤고 지금까지도 유사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계획적이고 세심한 친구부터 리더십이 넘치는 친구, 유쾌하고 재밌는 친구, 시니컬한 듯 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친구 등 성향은 모두 다르지만 그래서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사실은 서로에게 없는 점들로 말미암아 오는 즐거움이 더 크다. 생각해보니 작년 말에 가오슝에 다녀오고는 아직 여행을 못 떠났는데, 내년에는 꼭 함께 여행할 수 있길 바라본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 ChatGPT에게 여행의 정의를 물어봤다. 사전적 정의는 '낯선 곳으로 떠나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지역을 방문하거나 이동하는 일'이지만 철학적 정의는 단순한 이동을 넘어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상대화하고 새로운 시각을 얻기 위한 자기 확장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래, 이런데 어떻게 여행이라는 행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에게 여행은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지금 이 곳이 아닌 새로운 장소에서 나와 내가 속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고 발견하는 것. 신체가 허락하는 한 지속하고 싶은 일이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읽는 동안 참 행복했다. 비단 여행 뿐 아니라 삶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된 건 물론, 더 너그럽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책의 구절 중 가장 뾰족하게 와닿았던 문장을 덧붙이며 마치고자 한다.


"30인치짜리 트렁크에 온갖 살림살이를 싸서 갖고 다니다 손목이 상해버렸다. 타자를 칠 때마다 왼쪽 손목이 시큰거려 혹시 글 쓸 때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이 됐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그냥 단순한 근육통이라며 물리치료를 해주었다. 그 후로도 손목은 자주 아팠다.

어쩌면 사는 건 몰랐던 통증을 늘려가기도 하며, 그 통증에 익숙해지기도 하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울적하기도, 담담하기도 한 생각이었다." (p.221-222)


오일장의 가오슝 여행 사진, 함께 있으면 마냥 즐거운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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