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원치 않는 메일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바로 문제가 생겼을 때 업체에 쓰는 메일이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수하물 속에 있던 가죽 재킷이 다 녹아 항공사에 배상을 요구하고 싶을 때라거나, 내일이 경기인데 티켓이 안 와서 토트넘 구단에 표를 보내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처럼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쓰는 메일들 말이다.
업체에 무언가가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기대되는 답변은 크게 두 가지다.
1) 요구 조건을 처리해 줄 수 있다는 답변
2) 너무 무리한 요구라 처리해 주기 어렵다는 답변.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세 번째로 들을 수 있는 답변이 있다.
3) 씹힌다.
레벨 테스트 결과를 잃어버렸다던 첫 번째 어학원에서는 드디어 레벨을 알려주었다. 그렇지만 ‘시범 클래스 들으러 가도 될까요?’라는 물음에는 갑자기 답변을 멈추고 사라져 버렸다. 두 번째 어학원에서는 '문법 테스트 양식을 보내줄게!'라고 말해놓고 무엇도 보내주지 않았다. 또 세 번째 어학원에다가는 어떤 사이트를 경유해서 학원비를 결제하면 비용이 싸지길래 그렇게 결제해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당연히 답변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의 근로자들은 출근하면서부터 '오늘은 열 통의 메일만 보내야지'라고 마음을 정하고 할당량 이상은 메일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응답 없음도 응답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다. 이 말이 인간관계에서만 적용되는 말인 줄 알았다. 업무적으로도 응답 없음이 응답일 수도 있다니. 마치 업체들과 연애라도 하는 것처럼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묘하다. 내가 원하는 답을 줄 듯하면서도 어느샌가 멀어져 있는 그들. 프랑스 사업자들은 심심풀이로 고객을 꼬시나보다. 과연 로맨틱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숨 쉬듯 밀당을 배우니, 나도 곧 연애 고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원래 밀당을 좋아하지 않아서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답답함을 달래러 카페로 글을 쓰러 나갔다. 노트북을 꺼냈더니 종업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원래는 오후 세시부터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으니 특별히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면서. 특별하다는 말에 나를 꼬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는 아니고. 이게 프랑스식으로 카공족을 물리치는 방법인가 보다. 프랑스식 삶의 지혜에 또 한 번 감탄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도 카공족을 물리칠 때는 오후 세시부터만 컴퓨터를 쓰라고 하면 될 것이다. 물론 와이파이는 제공해주지 않아야 한다.
프랑스인처럼 살아보려고 일기를 일주일 후에 올리려다가 지금 올린다. 아직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따끈한 일기이므로 프랑스 문화에 젖어가고 있는 사람치고는 꽤나 성급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