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내 탓이오

6월 9일

by 너랑

파리는 29도였다. 아침부터 온몸이 끈적해서 잠을 설쳤다. 조깅을 나갈 수도 없었다. 몸이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뛰면 죽는다고. 발레 학원에서 사귄 친구 소피에게 “어떻게 프랑스인들은 이 날씨를 에어컨도 없이 견뎌?”라고 물었더니, 그녀는 “우린 그냥 땀 흘려.”라고 대답해 줬다. 그래. 내가 너무 한국식으로 생각했나 보다. 이곳에서는 더울 때는 사우나 왔다고 생각하고 계절을 느끼며 땀을 뻘뻘 흘리고, 못 참겠는 달에는 한 달 정도 바캉스 가는 게 당연한 건데.


불현듯 문화 이해도가 너무 낮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 왔으면 프랑스의 시스템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 지나치게 한국적인 이유로 시스템에 화가 났던 건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천주교에서도 고해 성사할 때에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면서 문제를 외부에서 찾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찾지 않았던가. 지나치게 울분에 차있었던 것 같아서 오늘 하루는 아무리 화나는 일들이 있어도, 스스로를 반성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져보기로 마음먹었다.


프랑스어 수업을 처음으로 들었다. 드디어 학원으로부터 시범 수업을 들으러 와도 된다는 메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테스트를 마치고도 수업을 듣기까지 일주일이나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미리 컨택을 했어야 했나 보다. 당연히 한국에서처럼 테스트 후딱 보고 돈만 있으면 바로 등록할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메일을 하루에 한통씩만 보내주는 프랑스 직원들. 덕분에 메일로 소통하느라 이 주나 소모했다. 그러나 그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기보다는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알았어야만 했는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로다.


교실에 들어가자 열기에 숨이 막혀왔다. 당연히 파리이므로 건물 내의 에어컨을 기대할 수 없었다. 문제는 3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한 반에 들어가 있었는데, 마치 콩나물시루의 콩나물들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들 건조기에서 막 꺼낸 고구마 말랭이처럼 보송보송했다. 그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신진대사가 좋아서 땀을 잘 흘리는 것조차, 그리고 남들은 보송한데 더위를 느끼는 것도 다 내 문제인가 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로다.


수업은 나쁘지 않았지만, 에어컨도 없는 학생들이 출근길의 신분당선 안의 승객들처럼 빼곡히 있으니 자꾸 폐소 공포증이 올 것만 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이 학원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니 선택하지 못한다는 말이 더 옳겠다. 이 좁은 학원에 다니게 되면 다시 공황장애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다. 프랑스어 공부가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약 먹고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렇게 저렴한 학원에 등록하지 못하게 된 것은 슬프게도 내가 공황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로다.


집에 와서 다른 어학원의 오랄 테스트를 보았다. 그녀는 친절해서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 들어주고, 내가 못 알아들어도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나의 스승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래의 스승은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내 레벨에 맞는 수업은 지금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받아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수차례 말했다. 그녀에게 부디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매달려보고 싶었지만, 어글리 코리안이 될 수는 없으므로 끝인사로 줌 채팅창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어학원 구하다가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이 역시도 어쩌면 내가 애매한 레벨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로다.


그러나 정말 내 탓일까? 날도 더운데 시범 삼아 내 탓을 해보았더니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 같다. 예상했던 것처럼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수련이 부족한 탓이... 아. 아니다. 여하튼 내일부터는 다시금 미성숙한 나로 돌아가 네 탓을 하며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성인 군자가 되는 것은 어쩔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좀 날씨라도 시원할 때로.


기분이 나아지는 마법 같은 주문을 마음 속으로 되뇌어 본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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