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오늘은 진짜 첫날이었다. 자꾸 양치기 소년처럼 처음이 뒤로 미루어지는 것 같지만, 이건 어제 적었듯 내 탓은 아니다. 어학원 가는 과정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시스템에 점점 학을 떼고 자포자기해갈 무렵에야 겨우 어학원에 등원할 수 있었다. 어학원 첫날.hwp 뒤에 (최종), (최최종), (진짜 최종)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럽권과 아시아권 학생들이 많은 독일의 어학원과 다르게 프랑스어 수업은 영미권 학생들이 많았다. 파리에 와서 조금만 지켜보아도 영미권 사람들이 프랑스 문화나 언어에 관심이 많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에밀리 인 파리’가 프랑스에 대한 미국인의 판타지를 보여주듯이 말이다. 프랑스어 수업은 냉정히 말하면 재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전시간인지라 하품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일상을 정기적으로 채워줄 무언가가 생기는 것은 좋았다. 내일은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요 몇 년 새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항상 바빴다. 다이어리에는 항상 무얼 배우러 다니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스케줄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는 뜨개질을 해서 일을 만들었다. 하지만 파리엔 온 요즘은 꽤 적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의무감에 몇 시간 나갔다 들어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주 많이 가졌다.
문득 왜 파리에 왔는지 기억났다.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이가 많지만 부끄럽게도 여태 홀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일상을 꾸리고 살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파리를 선택한 이유도 일상을 만들기 쉬운 도시일 것 같아서다. 내가 그동안 하고 있던 취미를 그대로 하려면 대도시로 가야 했고, 영미권의 어학원은 별로 내키지 않아서 파리를 선택했다.
지금까지 홀로 살아보기 성적은 나쁘지 않다. 한국만큼 빨리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슬금슬금 삶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 같다. 어학원, 발레학원 등으로 일상을 채워나가고 있고 이곳, 저곳에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고 있다. 또 살림은 아주 잘 해내지는 못하지만 유튜브를 선생님 삼아 최선을 다해 배워가고 있다.
어학원에 다녀와서 잠시 쉬다가 조깅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15구는 조금만 뛰면 에펠탑이 나온다. 계획적으로 간 척했지만, 사실은 길치라서 다른 이가 뛰는 대로 따라갔더니 얼떨결에 에펠탑이 나왔다. 에펠탑이 있는 상드 막스 공원에서 달리기라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몇 년 전에는 사진을 찍으러 왔던 곳인데.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나의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
여행을 적게 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관광지들이 큰 감흥 없이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말을 하면 비난받을 수 있지만, 원래 대자연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더욱 그렇다. 새로운 걸 보기만 하는 것은 크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 방식은 여러 가지 삶의 경험치를 늘리는 것과 내 인생에 없던 낯선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다. 보다 현지인스럽게 이 도시를 조금 더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