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날

5월 31일

by 너랑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어학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오늘 예정되어있던 레벨 테스트를 다음 주로 미루고 싶다는 이유에서 였다. 착오가 있어서 시험 일정을 겹치게 잡았단다. 거기다 항공사에서도 메일을 한 통 보내 왔다. 내 수하물에서 녹아버린 가죽을 배상해 줄 수 없다면서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아침부터 좋은 소식들이 넘쳐났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서, 시내 구경을 하려고 달리는 변기통에 앉았다. 옆에 대마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앉았다. 그 남자는 야릇한 향기가 나는 껌을 씹으며 이어폰도 없이 크게 음악을 켰다. 몰상식한 그의 행동에 불편해져,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걷다가 관성처럼 마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삼겹살 앞에 멈춰 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삼겹살 600그램을 카트에 담고 있었다.여행을 떠나온 근 2주 동안 단백질이라고는 햄버거의 패티밖에 먹지 않았다. 이렇게 축축 쳐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단백질 부족 탓도 있을까. 나는 탄수화물 중독자이기에, 혼자 있으면 이렇게 단백질을 먹어야 하는 것도 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역시 사람은 혼자 있어야 스스로를 알게 된다.


꿈에 아빠가 나왔다. 아빠는 어딘가를 바삐 가고 있었다. 꿈에서도 아빠의 실루엣과 걸음걸이가 익숙했다. 아빠의 머리카락이 눈이 내린 것처럼 희게 새어 있었다. 슬펐다. 아빠가 나이 든 모습을 마주해 버린 것이. “가족은 마치 고슴도치 같아.” 대학교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함께 있으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그 말이. 붙어 있을 때는 불편한 시간도 많았지만, 지금은 멀리 있는 아빠가 보고 싶다.


파리에 오기 전에 매주 글쓰기 모임을 했었다. 이번 달은 여행때문에 중간까지밖에 함께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친구들은 감사하게도 본인들이 쓴 글을 함께 있지 못하는 내게 보내주었다. 타지에서 그들의 글을 보면서 많이 웃었다. 익숙함에서 오는 안정감도 느껴졌다. 파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수업의 쫑파티에 가있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보내왔다. 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내 사진의 누끼를 따서 합성하려다 이내 멈추었다. 친구들에게 언제나 쿨한 모습이고 싶기 때문에.


단백질과 가족과 친구를 다 놔두고, 나는 무엇을 바라 이렇게 떠나오게 된 걸까. 조금은 우울해지는 날이기에 상념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운명론적으로 말하자면 뭔가 강한 느낌이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강렬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기 온 이유가 뭔지 찾고 싶은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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