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달력 한 장만 넘기면 초5, 중1이 되는 두 아들은,
‘12월 25일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모태신앙(그 모태는 바로 내 뱃속)이다. 한편으로는 산타할아버지가 새벽에 찾아와 트리 아래 선물을 놓고 가는 날이란 이유로 1년 내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다. 밤새 이집 저집 다니시느라 피곤하실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우유와 쿠키를 준비해놓고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선물 포장 뜯는 재미가 성탄 예배보다 훨씬 좋은 아이들이다. 아니 아이들이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순수함의 결정체들이었다.
작년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아이들은 원치 않았던 폭탄선언을 듣고야 말았으니, 산타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선물은 엄마, 아빠가 주는 것이니 선물이 받고 싶으면 엄마, 아빠에게 잘하라는 협박과도 같은 조언이었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산타 엄빠설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름 10년 이상 살아온 인생 경험으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그런 상태였었는지, 한편으론 진실을 알고 나서 개운해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동심을 잃어버린 대신 대놓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요구할 수 있게 된 아이들은, 이러나저러나 손해 볼 게 하나도 없어 여전히 행복하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인 선물을 보고 조금 덜 놀라워할 뿐.
폭탄선언으로 이득을 보는 쪽은 당연히 남편과 나다. 아이들을 깜빡 속이기 위해 24일 날 밤 아이들이 완전히 곯아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선물을 몰래 가져다 놓는 007작전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이벤트가 가장 귀찮고 힘들었다. 처음 몇 년은 아이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귀여워서 선물을 준비하는 나도 설레고 재밌었는데, 매해 반복하려니 이것도 이제 힘들고 귀찮아진 것이다. 나이가 들었는지 아이들이 잠들면 나도 같이 자고 싶고, 이벤트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안 그래도 곰 한 마리씩 얹고 다니는 듯한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순전히 내가 귀찮아져서 커밍아웃해버린 것이다.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모 아이돌의 아버지께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엄마 아빠가 주는 거야. 그러니 선물 받고 싶으면 엄마 아빠한테 잘해.”
어린 시절 이렇게 말씀하셨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용기를 내게 되었다. (맞다. 표절이다. 이 아이돌이 너무 잘 자란 남의 집 아들이라 우리 아들도 이리 크라고 따라 해봤다…. 는 핑계고 그냥 귀찮아졌다. 동심 미안) 심지어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다녀간 사진을 남겨놓는 치밀한 눈속임 작전도 이제 대놓고 어플이라고 알려줘 버렸다.
결론은 내가 귀찮고 힘들어서 동심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
가끔 초등 고학년임에도 동심을 강제로 유지하고 있다는 집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좀 참고 노력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후회는 잠깐 편안함은 아우토반처럼 쭉 탄탄대로로 보장되어 있다. 그렇다고 선물을 안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꼬박꼬박 요구하는 대로 선물을 준비해서 포장까지 정성스럽게 해서 트리 아래에 놓아둔다. 대신 더 이상 산타 코스프레를 하지 않는다는 것뿐.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산타 할아버지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광고를 위해 만들었다는, 산타 코카콜라설로 동심 파괴를 한 사실이 몹시 미안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의 동심이 완전히 파괴된 것 같지는 않다.
며칠 전 매일을 물고 빨고 하는 내 사랑 둘째 아이와 한판 한 사건이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밝히면 이렇다.
우리 집 아이들은 영어학원을 따로 다니지 않는다. 대신 매일 영어 동화 사이트에 접속해서 한 시간씩 영어 동화(라 쓰고 애니메이션이라 읽는다)를 본다.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기 싫어하고, 나도 비싼 돈 내고 벌써부터 보낼 생각은 없으나, 영어와 익숙해지라고(정말?) 이걸 시킨 지 2년째다. 아이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객관적인 파악은 어렵지만, 제법 친해진 듯은 하여 만족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게 영어 동화 사이트 접속하는 것 말고도 많다는 걸 알기 시작한 아이들이 그 시간에 딴짓을 겸해서 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엄마는 그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동안은 좋은 말로 “다른 걸 보는 건 안 된다. 집중해서 봐라.”라고 하고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그날 유독 아이의 딴짓이 눈에 거슬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유튜브 창 띄워놓고 엄마 몰래 보는 거니? 그렇게 보면 안 들킬 줄 알았어? 다 꺼! 노트북 닫아!”
로 시작한 나의 분노는 끝없이 치솟기 시작했다.
평소엔 순한 양처럼 한없이 자상하고 온순한 사람이지만(자칭), 한번 화가 나면 두 아들이 찍소리도 못할 만큼 돌변하는 사람이라 나도 웬만하면 참으면서 산다. 그런데 그날은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부글거려야 할 마그마가 지표면 가까이 올라와 있었던 것처럼 지면을 뚫고 나와 하늘까지 치솟아버렸다.
아이는 얼음이 되었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엄마들의 레퍼토리겠지만, 아이의 딴짓에서 시작한 화는 평소 행동까지 끌고 와 버렸고, “이럴 거면 다 하지 마!”까지 완창을 해버렸다.
영어 동화를 보기 전 아이는
“엄마, 나 오늘 친구들이랑 6시에 만나서 놀기로 했는데, 할 일 다 하고 나면 놀러 가도 돼?”
라고 물었었다. 나는
“저녁 먹어야 하는 시간에 나가겠다고? 그럼, 몇 시에 오려고? 시간이 애매해서 안 돼.”
라고 했다가
“그럼 저녁을 먹고 나가서 놀다 와.”
라며 아이의 놀이 시간에 좀 더 자유를 주기 위한 완화 정책을 펼쳤었다. 근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이는 다시 나가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를 가라앉히겠다며 좋아하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러닝머신에서 달리기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기가 팍 죽어 있어야 할 아이가 다가왔다.
“엄마, 나 할 일 다 했으니까 놀이터 가도 돼?”
“...”
“(눈 초롱초롱, 깜빡깜빡)”
“갔다 와. 대신 저녁은 두 번 못 해. 그니까 너 오늘 저녁은 못 먹는 거야.”
“(해맑게)응, 갔다 올게”
아이는 신이 나서 나갔다. 저녁 따윈 어찌돼든 상관없다는 듯 정말 그냥 신이 나서 나가버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남은 운동 시간을 꿋꿋이 채웠고, 운동하는 내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라는 생각으로.
운동을 끝내고 저녁을 준비하다가 문득 내가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생각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아이가 영어 동화를 보는 시간에 집중하지 않았다고, 잠깐 딴짓했다고 불같이 화를 낸 것이다. 불에 불을 붙여 3단 고음 올리듯 화산 폭발하듯 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11살 된 아이가 한 시간씩 앉아서 온전히 그 화면에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않나. 눈으로는 TV 화면을 보면서도 손에는 늘 휴대폰이 들려 있는 내가 그걸 모르면 누가 알아주랴.
또 아이는 나름대로 자기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매일 해야 하는 수학 문제집 2장 풀기를 성실히 해놓고 놀러 가겠다고 해맑게 당당히 이야기했는데, “저녁은 없다!”니.
유치함과 아이 같음은 한 끗 차이인데, 둘은 정말 태양계와 안드로메다은하만큼의 거리가 있다.
유치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나이가 어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라는 뜻도 있다. 사실 우리가 ‘유치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할 때가 대부분이다. 즉 나이가 어리다고 다 유치한 게 아니라 갖추어야 할 만큼의 수준을 갖추지 못하거나, 이제 미숙함을 좀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생각이 짧고 행동이 아둔할 때 유치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 같다는 것 역시 나이가 어리다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이 같음은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재고 계산하느라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숨기거나 애써 연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에 솔직하다. 그게 아이 같음이고 그게 곧 동심이다. 산타를 믿고 안 믿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행동하며,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믿어야 할 것조차 믿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유치한 어른의 것이지 순수한 아이의 것이 아니다.
저녁을 준비하며 둘째 아이의 몫을 남겨놓고 첫째 아이와 먼저 맛있게 식사했다. 그리고 볼이 빨개진 채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남겨둔 저녁밥을 차려주었다. 자신의 유치함에 멋쩍어져 “맛있어? 많이 먹어.” 한마디 하고 뛰어노느라 허기진 배를 맛있게 채우는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산타 엄빠설이나 코카콜라설 따위로 사라질 동심이 아니다. 화산 폭발하듯 터져버린 엄마의 화에도 재가 되어 사라지지 않은 아이의 동심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