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될수록 좋다고 하여 '진피'라 부르기도
겨울의 제철 과일하면 무엇보다 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른 과일들처럼 칼로 껍질을 깎거나 다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귤을 먹는 것은 손쉽고 편하다. 그래서인지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는 것은 꽤 쏠쏠한 겨울의 재미이다.
▲ 기명절지도 가리개 조석진, 19세기 말~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병풍 각 폭 220x70cm, 화면 각 폭 153.7x61.6cm ⓒ 국립고궁박물관(www.gogung.go.kr)
위의 그림은 조석진(1853~1920)이 그린 2폭의 기명절지도 가리개이다. 제1폭에는 세 점의 고동기를 중심으로 위에서부터 모란, 복숭아, 장미가 있다. 제2폭에는 매화 가지를 꽂은 고동기 아래쪽으로 꽃가지와 수선화 화분, 수선화 두 뿌리와 귤을 그렸다.
제2폭 왼쪽 하단에 '신 조석진이 삼가 그리다(臣趙錫晉謹畵;신 조석진 근화)'라는 글씨와 도장이 찍혀 있다. '조석진인(趙錫晉印)'이라 적힌 도장은 백문방인으로, 글자를 옴폭하게 파내서 종이에 찍었을 때 글씨가 하얗게 나오는 것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석진이 왕인 고종 혹은 순종에게 바치기 위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왼쪽 그림의 제일 아래쪽에 있는 귤은 그림을 해석하는 자료에 따라 유자라고 설명한 경우도 있다.
▲ 서귀포의 환상 이중섭, 1951년, 나무판에 유채, 56x92 cm, 호암미술관 소장
ⓒ 공유마당(CC BY)
싸우는 소, 흰 소, 투계 등 소 그림으로 유명한 근대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의 작품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귤을 따서 광주리에 담고 나르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아이들의 머리만큼 큰 귤이 특히 인상적이다.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밝고 따뜻한 색채는 추운 겨울이면 더욱 가고 싶은 따뜻한 남쪽 나라를 떠오르게 한다.
나뭇가지에 매달리거나 새를 타고 공중을 나는 모습은 <서귀포의 환상>이라는 제목처럼,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환상적인 면모를 드러내준다.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장면, 꿈꾸는 듯 몽롱한 분위기는 우리가 꿈꾸는 낙원의 모습 같다.
이중섭이 즐겨 그리던 작품의 소재로는 소 외에도 어린이와 가족이 있으며, 향토적이며 동화적인 특징을 가진다. 이는 자전적 요소를 반영하는데, 떨어져 있는 가족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무릉도원 같은 환상적인 이상세계에 반영해 그림으로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귤이 가장 많이 재배되는 곳하면 제주도가 생각나는데, 그 역사는 삼국시대부터로 추정된다. 귤(橘)이라는 단어는 순우리말이 아닌 한자어인데, 귤과 밀감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 감귤(柑橘) 역시 한자어이다.
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백제 문주왕 2년(476년)에 탐라국에서 공물을 받았다는 것으로, <탐라지>에 적혀 있다. 이 때문에 귤이라는 어휘가 생성된 시기는 476년으로 잡고 있지만, 이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귤나무의 익은 열매 껍질을 햇볕에 말린 것이 귤피이다. 이 약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여 묵을 진(陳) 자를 써서 진피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먹는 과일과 다르게 맛은 쓰고 매우며 성질은 따뜻하다.
▲ 진피 ⓒ 윤소정
귤 껍질은 기운이 뭉친 것을 풀어주어 기의 순환을 촉진한다. 이로 인해 비위장이 스스로 건강해지도록 하는 것이 이 약재의 특징이다. 귤피는 위액 분비 촉진, 소화 기능 강화 작용이 있어 식욕이 부진하거나 헛배가 부르고 아플 때 좋다. 토하거나 대변이 묽은 증상에도 도움이 된다. 가래를 삭이는 효과가 있어서 기침에도 사용한다.
향긋한 귤피는 차로 마시기에도 좋은데, 비타민 C가 풍부해 겨울철 감기 예방에도 활용할 수 있다. 귤을 과일로 먹고 난 다음, 벗긴 껍질을 깨끗하게 씻어서 말리면 귤피를 만들어 이용할 수 있다. 다만 곰팡이가 피지 않게 잘 건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귤피를 약재로 사용할 때는 11월에 채취하여 말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보다 이른 시기인 여름에 귤나무의 유과(어린 작은 과실)나 미성숙한 과실의 껍질을 채취하여 말린 것을 청피라고 한다.
귤피가 비장과 폐에 작용하는 것과 달리, 청피는 간과 담에 작용한다. 또한 귤피의 성질이 온화한 데 반해, 청피는 좀 더 강렬한 효과를 보인다. 청피는 옆구리가 뻐근하게 결리면서 아프거나, 유방이 팽창하면서 아플 때(유방창통) 좋다. 월경 전 혹은 월경이 시작하는 즈음 유방창통이 나타날 때가 많다. 고환이나 음낭이 커지면서 아프거나 아랫배가 당기고 단단하게 되며 아픈 병증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는 오장육부 중에서 간과 담이 옆구리 같은 몸의 옆부분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또한 간의 기운이 몰려서 풀리지 않을 때 유방창통이 생기며, 간 경락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을 때 외생식기나 아랫배가 뭉치고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한의사와 함께 떠나는 옛그림 여행'에 연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