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따라 나를 채우다

by 느루

어느 날 무심코 유튜브 채널을 뒤적이다가 배우 최강희가 그림을 그리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마당 풍경을 그리다가 갑자기 그림 속 마당 한구석에 거실 의자를 그려 넣었다.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었지만 이상하게 조화로웠다.

단순히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그림이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며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예전에 큰 손녀 효은이가 그렸던 그림이었다. 어느 날 비빔밥을 그려와서 보여주었는데 비빔밥 그릇과 네 귀퉁이에 자기의 기분이 담긴 각각의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두 사람의 그림은 전혀 다르지만, 각자의 감성과 자신만의 시선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그 둘의 그림처럼 나도 나만의 시선을 담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최강희의 그리는 동안 머릿속이 비워지고 평온해졌다는 말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고 오롯이 선과 색에 집중하게 된다고 했다.

‘지금, 나야말로 마음의 휴식이 절실하지 않은가.’

손주들을 돌보며 늘 바쁜 하루를 보내지만 정작 내 마음은 돌보지 못한 채 지쳐가고 있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말마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은 내 실력을 보기 위해 사과를 그려보라고 했다.

‘과연 내가 그릴 수 있을까? 잘 그리고 싶다’

막연한 두려움과 욕심이 동시에 밀려왔다. 스케치북을 마주한 순간, 긴장되면서도 설레었다.

하지만 막상 연필을 들자, 손끝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과를 들여다보았다. 그냥 빨갛고 맛있는 과일로만 생각했던 사과가 너무 낯설게 보였다. 그저 빨갛다고만 알고 있었던 사과 껍질의 색은 정말 다양했다. 그리고 빛이 닿는 부분과 어둠이 스며드는 부분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그림자가 생기는 방향도 제각각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무언가를 오래 바라보지 않게 되었을까?

원래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 편이었다. 같은 걸 봐도 대충 보고 넘어갔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려 하니 비로소 사과의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는 대로 그려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연필 선을 긋고 지우기를 반복할수록 더 이상한 그림이 되어갔다.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너무 완벽하게 그리려고 하면 손이 굳어요. 일단 느낌대로 그려보세요."

정말 그랬다. 연필을 쥔 손이 뻐근했다. 지우개를 내려놓고 다시 시도했다.

사과의 둥근 윤곽을 따라 연필을 움직였다. 처음엔 어렵게만 느껴졌던 선이 점점 형태를 잡아갔다. 불안했던 선들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며, 사과의 입체감이 살아났다.

처음에는 어색한 선들이 불안했지만, 점점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배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진 수업에서는 종이를 보지 않고 그리는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을 배웠다. 사물의 윤곽선을 한 번의 선으로 그려야 하는 연습이었다.

"연필을 떼지 말고 그려보세요."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선이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고 지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실수를 지우지 말라고 했다.


다음으로 블라인드 컨투어 드로잉. 이번에는 종이를 보지 않고 사물만 바라보면서 선을 그려야 했다. 연필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니 불안했다.

하지만 계속 그려나가다 보니 오히려 사물의 형태를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내가 보는 방식을 표현하는 거구나.’

그림이란 게 결국 그런 거였다. 처음부터 완벽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흐름을 따라가며 만들어지는 것.


그림이 단순한 선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명암을 배우면서였다.

"명암을 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빛이에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사과를 바라보았다. 빛이 닿는 부분은 선명했고, 반대편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반사광이 있었다.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생기고, 어둠 속에서도 빛은 반사된다.

그 사실이 그림뿐만 아니라 삶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늘 밝은 면만 보려 하지만, 사실 그림자가 있어야 더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누구나 어둠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그 어둠 덕분에 빛이 더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처음에는 예쁘게,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으로 시작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풍경을 담아낸 그림을 내 글에 넣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사물을 깊이 들여다보는 법, 선을 이용하는 방법,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균형. 그리고 실수를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어쩌면 그림을 배우는 동안 나 자신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의 사과를 그리면서도 선을 따라가며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단순히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가 나를 다듬어가는 시간이 되었고 더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그림을 통해 사과를 그리면서도, 나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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