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로롯, 쉬다

by 누룩취


여행은 때로 나의 세계를 타인의 세계와 섞는 일이다.

나의 고집스러운 로컬 지향과 가족들의 세련된 취향이 충돌하지 않고 나란히 흐르는 시간.

그 헐거운 틈새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의 얼굴을 마주했다.

소란한 시장의 복판에서 역설적으로 얻은 평온에 대하여, 그리고 함께이기에 가능했던 '따로'의 시간에 대하여 기록한다.


이번 여행은 '따로 또 같이'라는 헐거운 약속으로 채워지고 있다.

평소 나의 여행 지침은 명확하다.

화려한 간판보다는 골목 어귀의 로컬 식당을, 매끄러운 여행자의 언어보다는 현지인의 투박한 식탁을 선호한다.

가식 없는 삶의 냄새를 맡아야 비로소 낯선 땅에 발을 붙였다는 실감이 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다.

두 딸이 앞장서서 고른 곳은 서양 여행객들이 좋아할 법한 세련된 브런치 카페였다.

이름도 생소한 메뉴들이 나열된 그곳에서 아내마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의 고집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우리 가족 모두이기에, 나의 취향보다 그들의 만족이 더 소중한 법이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딸들은 미리 점찍어둔 다른 카페로 향했다.

나는 혼자 잠시 호텔로 돌아왔다.

술은 때론, 혼자만의 시간을 강제하기도 한다.

객실의 정적 속에서 타국까지 따라온 일상의 자잘한 상념들을 정리하며 남은 하루를 위한 채비를 마쳤다.

타국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각들을 털어내고, 다시 가족들이 기다리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페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각자 챙겨 온 책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페이지를 넘기는 한가로운 씨에스타.

그 정적인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혼자 '와로롯 시장'으로 향했다.


와로롯은 하나의 작은 지구다.

저마다의 언어와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흘러들어와, 각자의 생(生)에 필요한 조각들을 하나씩 품에 안고 다시 세상 속으로 흩어진다.

시장통은 활기로 가득했다.

이 거대한 삶의 전시장 속에서 아무런 방향도 없이 타인을 구경하는 이는 나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누군가에게 휴식은 시원한 에어컨 아래 책장을 넘기는 것이겠지만, 나에게 휴식은 와로롯의 한복판, 그 뜨거운 생동감 속에 섞여 드는 것이었다.

타인의 치열한 일상을 관조하며 비로소 나의 일상을 객관화할 수 있는 여유, 그것이 내가 여행에서 찾고자 하는 쉼의 본질이었다.

얼마 후, 카페에서 충분한 정적을 즐긴 가족들과 합류해 다시 와로롯을 찾았다.

이번에는 구경꾼이 아닌 구매자가 되어 '차(Tea)' 한 봉지를 샀다.

화려한 장식품은 아니지만, 한국에 돌아가 찻잔 속에 이국의 향이 피어오를 때마다 오늘의 이 소란스러운 평화를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번 여행이 나에게 주는 작고 소중한 기념품이다.

핀 강변의 화훼시장을 천천히 둘러보며 꽃향기에 취해 걷다 보니, 이국의 햇살은 어느덧 정수리를 따갑게 달구고 있었다.

강한 낮볕을 피해 강 건너의 한 카페로 들어왔다. 얼음 가득한 태국식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펜을 들었다.

강물은 무심히 흐르고, 건너편 시장의 소음은 강바람에 씻겨 아스라이 엷어진다.

가족들의 대화 소리와 카페의 음악 소리, 그리고 지금 내 컵 속에서 녹아내리는 얼음 소리까지. 이 모든 불협화음이 오늘 나의 하루를 가장 완벽하게 조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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