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또(Sato)를 묻다

낯선 볕 아래 익는 기억

by 누룩취

낯선 땅의 시장을 헤매는 일은 결국 내가 아는 맛의 영토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치앙마이의 눅진한 열기 속에서 나는 뜬금없이 ‘사또(Sato, สาโท)’를 찾아 헤맸다.


이번 여정은 특별하다.

둘째 딸아이가 긴 입시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온 뒤 처음으로 온 가족이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은,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진 일정 사이사이, 나는 틈을 내어 이방의 술 익는 냄새를 쫓았다.


어느덧 오십 대가 된 가장이자 애주가인 나에게 전통주란 단순히 취기를 빌리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할머니의 안방에서 익어가던 고요한 기다림의 미학이며, 쌀과 누룩이 만나 빚어내는 시간의 결정체다.

태국의 쌀로 빚은 이 전통 발효주가 내가 아는 우리네 막걸리와 어떤 접점에서 조우하고 또 어디서 갈라지는지,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내가 알던 막걸리처럼, 아마도 사또 역시 첫 모금은 무심하고 끝 맛은 느리게 남는 술일 것이다.


치앙마이의 거리는 온통 화려한 맥주 라벨과 글로벌 위스키들의 전시장 같았다.

나는 가족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볼거리로 눈을 돌린 사이, 마치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더듬듯, 도시의 모세혈관 같은 골목들을 훑기 시작했다.

에어컨 바람이 서늘한 세븐일레븐의 매끄러운 냉장고부터 먼지 앉은 로컬 마켓의 구석진 가판대, 그리고 탑스 데일리와 로터스의 즐비한 진열대까지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또는 없었다.

점원들은 ‘사또’라는 짧은 음절에 고개를 가로저었으며, 어떤 이는 알아듣지 못할 태국어로 맥주 코너를 가리켰다.

나는 화려한 술들 사이에서 길 잃은 이방인이 되었다.

치앙마이의 일몰은 사또의 미지의 뽀얀 빛깔을 닮지 않은 채 그저 붉고 강렬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대중의 입맛에서 멀어진 전통이란 이토록 연약한 것인가.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한 민족의 고유한 숨결이 담긴 술조차 뒷방으로 밀려난 현실을 마주하자 묘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사또를 향한 집요한 호기심은 어쩌면 점차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뒤늦은 연민이자, 변하지 않는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중년의 고집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의 화목한 대화 속에 머물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은 자꾸만 보이지 않는 전통의 흔적을 향해 서성였다.


결국 나는 사또 대신 ‘루앙카오(Ruang Khao)’ 한 병을 손에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투명한 증류주가 전해주는 서늘한 촉감이 손바닥에 닿았다.

안주는 숙소 근처 야시장에서 갓 버무려낸 쏨땀이었다.

비닐봉지에 담긴 채 온기를 머금은 쏨땀은 타국에서의 허기를 달래줄 유일한 동행이었다.

성인이 된 둘째와 잔을 맞부딪친다.

고된 입시를 견뎌낸 대견함과 그 시간을 함께 통과한 가장의 안도감을 담아 가벼운 건배를 나눈다.


이국의 밤거리로 향한 딸들의 방을 뒤로하고 홀로 앉아 무색무취의 액체를 잔에 따랐다.

첫 모금은 28도의 도수답게 목구멍을 뜨겁게 훑고 내려갔다.

사또를 찾지 못한 아쉬움이 그 열기 속에 잠시 녹아내렸다.

매콤하고 새콤한 쏨땀이 혀끝을 자극할 때마다 루앙카오의 독한 기운이 그 자극을 부드럽게 씻어냈다.

야시장의 활기가 채 가시지 않은 쏨땀의 아삭함은 끝내 만나지 못한 사또의 부재를 채워주는 정직한 위로였다.

찾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 아쉬움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여백이다.

사또를 만나지 못했기에 나는 다음 여행에서도 여전히 술 익는 냄새를 찾아 시장 골목을 기웃거릴 것이다.

혼자 마시는 루앙카오 한 잔에 치앙마이의 밤이 깊어간다.

내일이면 나는 다시 이방인의 눈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전통의 조각들을 찾아 가족과 함께 길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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