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여백에서 만난 낯선 온기, 사또

by 누룩취

낯선 도시의 진열대, 잊혀진 전통의 이름

치앙마이의 볕은 뜨거웠으나 올드타운의 골목마다 스민 공기는 달았다. 그 단내를 쫓아 나는 며칠째 태국의 전통주인 ‘사또(สาโท Sato)’를 찾아 헤맸다. 집에서 직접 술을 빚는 것이 취미이다 보니, 태국에도 우리 막걸리와 닮은 술이 있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동한 탓이었다.


하지만 찾으려 할수록 사또는 신기루처럼 멀어졌다. 편의점이나 마트의 점원들에게 이름을 묻고 사진을 보여주어도 그들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오히려 마트 진열대에는 우리나라 국순당의 막걸리와 소주가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낯선 한글 이름의 소주 브랜드까지 즐비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찾는 ‘사또’는 어디에도 없었다. 현대화된 도시의 매끈한 진열대 위에서 촌스러운 이름의 전통주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와로롯 가는 길, 36바트의 보물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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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를 떠나기 하루 전날, 가족들과 함께 지인들의 선물을 사러 와로롯 시장으로 향했다. 라탄거리를 따라 걷는 길은 활기찼으나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세븐일레븐 하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들어선 그곳 맥주 냉장고 맨 아래 칸에서, 나는 마침내 ‘사또’를 발견했다.

보석이라도 발견한 듯 술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쇼핑을 마쳤다. 태국 막걸리 ‘사또’는 맥주처럼 진한 갈색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그 안에 쌀로 빚은 발효주가 담겨 있으리라 짐작하기 어려웠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야시장에 들러 안주 몇 가지를 샀다. 술 한 병에 고작 36바트였지만, 그 술을 위해 100바트에 가까운 안줏값을 지불하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웠다. 이국에서 맛보는 이국의 막걸리라니, 그 설렘은 가격으로 매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찹쌀과 룩뺑이 빚은 국경 없는 양조법

호텔 방에 앉아 조심스레 잔을 채웠다. 사또는 찹쌀과 태국식 누룩인 ‘룩뺑’, 그리고 물로만 빚어진다. 우리의 술이 쌀과 누룩, 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양조법이다. 잔을 코끝으로 가져가니 오래된 막걸리 특유의 고릿한 향이 훅 끼쳐왔다. 시간이 좀 지난 막걸리의 냄새가 이 먼 타국에서 느껴지는 것이 묘했다.

술은 막걸리처럼 뿌연 탁주가 아니라, 탁질을 가라앉혀 맑게 떠낸 청주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한 모금 머금어보니 우리 막걸리와 같은 탄산의 자극은 없었고 조금 더 달큼했다.


효모의 숨은 잠들고, 가족의 온기는 깨어나다

사또 역시 막걸리처럼 한 번에 빚는 단양주라 한다. 대개 이레에서 열흘이면 술이 익는 법인데, 유통기한이 6개월이나 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살균 처리를 거쳐 효모의 숨을 죽인 모양이었다. 도수는 6.5도. 술이 익숙하지 않은 둘째 딸아이도 “음… 괜찮네” 하며 가볍게 잔을 비울 수 있을 만큼 순했다.

마음속 응어리까지 맑게 씻어내 주는 이국 여행에서의 가족의 대화처럼, 사또 한 잔은 우리 가족의 여행 끝자락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낯선 이름의 술이었지만 그 속에는 사람이 살고, 시간이 발효되는 보편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오늘, 36바트짜리 술병 안에 치앙마이의 마지막 밤은 발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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