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빚은 올, 마음을 감싸람 바람
삶의 모든 순간을 기록한 가장 얇은 역사책
동남아시아의 맹렬한 햇볕은 생명을 키워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아래 선 이들의 기력을 송두리째 앗아가기도 한다. 그 뜨거운 숨결 속에서 사람들을 지켜온 건 거창한 문명이 아닌, 투박한 무명천 한 장이었다. 태국에서는 이를 ‘파카오마(ผ้าขาวม้า Pha Khao Ma)’라 부른다.
파카오마는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다. 그것은 태국인들의 삶을 기록한 가장 얇은 역사책이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정오의 밭일 중에는 머리에 둘러 땀을 막아주는 수건이 되고, 열기가 몸을 옥죄어 올 때는 허리에 감아 바람 길을 내어주는 시원한 치마가 된다. 일과를 마친 저녁, 고단한 부모의 손길로 나무 사이에 파카오마를 묶으면, 그곳은 이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아이들의 해먹이 된다. 생존과 휴식, 삶의 모든 순간이 그 체크무늬 올 사이사이에 스며 있다.
일상의 도구가 전쟁의 표식이 되기까지
이 다정한 천의 변주는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들로 이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를 ‘크라마(Krama)’라고 부르며 아기를 업거나 머리를 보호하는 데 쓴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도구도 역사의 광풍 앞에서는 다른 얼굴을 했다. 크메르 루주 시절, 붉은 체크무늬 크라마는 계급과 소속을 가르는 잔혹한 표식이 되어 누군가의 생사를 갈랐다. 베트남의 ‘칸런(Khăn rằn)’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 당시, 통일된 군복이 없던 유격대원들은 평범한 농민의 옷차림 위에 이 흑백의 천을 둘러 서로가 아군임을 확인했다. 동남아시아 민중의 일상을 지켜온 스카프들이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비극적인 전쟁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이 얇은 천이 감당해야 했던 역사의 무게를 짐작게 한다.
징짜이 마켓이 아닌 와로롯 시장으로 향한 이유
이번 치앙마이 여행에서 나는 파카오마를 하나 손에 넣고 싶었다. 세련된 디자인과 매끈한 감촉을 자랑하는 ‘징짜이 마켓’의 고가 제품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관광객의 기념품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손때가 묻어날 법한 진짜 생활의 도구였다. 결국 발길이 닿은 곳은 활기찬 생명력이 꿈틀대는 와로롯 시장이었다. 그곳에서 단돈 80바트를 주고 투박한 파카오마 하나를 샀다.
사또(Sato)를 닮은 투박한 다정함을 목에 두르고
에어컨 바람이 지배하는 태국의 현대 도시에서 파카오마는 점차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가고 있다지만, 흙먼지 날리는 농촌에서는 여전히 든든한 현역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그 고집스러운 투박함이, 전통주 ‘사또(สาโท Sato)’를 닮았다. 세련되지는 않았어도 잔을 비울 때 느껴지던 그 다정함이 이 천 조각에도 깃들어 있는 듯했다.
곧 귀국길에 오르면 나는 칼바람이 부는 서울의 한복판에 서게 될 것이다. 36바트짜리 술병 안에 치앙마이의 마지막 밤을 발효시켰던 것처럼, 나는 80바트짜리 파카오마를 목에 정성껏 두를 것이다. 이국의 뜨거운 볕과 누군가의 땀방울, 그리고 끈질기게 이어져 온 삶의 온기가 담긴 이 천은 서울의 시린 겨울바람으로부터 나를 따뜻하게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