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이청(嘉覽而淸)

더 푸르지 않아도 좋을, 단 한 번의 기록

by 누룩취

매번 술 맛이 똑같지 않은 것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 술이 가진 가장 귀한 성정이다.

프랑스의 와인이 해마다 다른 풍미를 ‘빈티지’라 부르며 그해의 태양과 바람의 기록으로 대접하듯, 우리 술 역시 마찬가지다.

쌀이 생산된 그 해의 날씨와 항아리 곁을 스쳐 지나간 바람의 온도와 습도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만약 내가 매번 똑같은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 대화하며 빚은 술이 아니라 규격에 맞춰 생산된 공산품일 것이다.


십여 일 앞으로 다가온 설을 앞두고, 나는 술을 떴다.

가을에 담가놓은 술이 적당히 익었다. 향은 향대로, 맛은 맛대로 올해도 마음에 든다. 어느새 술구더기도 다 가라앉고 맑게 올라온 청주는 긴 기다림의 끝을 알려왔다.


작년 술은 마음이 앞서 너무 일찍 거르는 바람에 입에 달았는데, 올해는 그 시기가 적당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 술에 단맛이 부족해 채주 시기를 서둘렀던 게 작년이었으니, 술의 맛과 향은 빚는 이의 감각에 매번 기분 좋은 어깃장을 놓는다. 어느 해는 쌀이 약해 떠오르는 앙금이 많아 거르기가 힘들었고, 어느 해는 기름이 유독 많이 뜨기도 했다. 같은 주방문(酒方文)의 술을 빚어도 해마다 다른 향기를 내어 준다.


차례상에 오를 술 몇 병, 처가와 지인들에게 보낼 술, 아내의 부탁과 딸아이의 은사께 전할 술까지 차례로 병입을 마친다. 용수를 박아 정성껏 받아낸 이 첫 술들이 명절의 귀한 선물이 된다. 하지만 술 빚는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청주를 뜨고 남은 것들은 다시 항아리 속에서 숙성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명절이 지나고 보름 정도 흐른 뒤, 나는 다시 항아리를 연다.

그때야 남은 것들을 면포에 받쳐 술을 내린다. 거기에 남은 지게미에 물을 부어 한 번 더 내리면 그야말로 진정한 막걸리가 된다. 청주가 정성스러운 선물로 나간다면, 막걸리는 이웃들과 벌이는 작은 잔치의 주인공이다. 명절 끝자락이라 남은 음식들이 넉넉하니 따로 안주를 준비할 수고도 없다. 이 정겨운 소란함 속에서 나는 새삼 술을 빚는다는 일의 본질을 생각한다.


술을 빚는 일은 이처럼 자연의 섭리를 항아리 속에 담아내는 하나의 실천이다.

밑술을 앉히고 덧술을 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가람이청(嘉覽而淸)’이라는 나만의 문장을 새겼다. 아름답게 바라보니 마음이 맑아지고, 그 맑음이 술에도 스며든다는 뜻이다. 술을 빚는 이는 술의 맛을 억지로 주조하는 자가 아니라, 자연이 항아리 안에서 스스로 조화를 이루도록 맑은 눈으로 관조하는 자여야 한다.


흔히 앞선 세대보다 나은 결과물을 내는 것을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부르며 성취의 척도로 삼곤 한다.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러야 한다는 그 말은, 나에게도 한때 앞선 세대를 넘어서야 한다는 치열한 분투와 강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술독 앞에서 그 말을 내려놓는다. 내가 뭐라고 감히 할머니보다 더 뛰어난 술을 빚을 수 있겠는가. 할머니는 할머니의 생(生)을 담아 그분의 술을 빚으셨고, 나는 그저 내 기억 속 할머니의 술맛이 좋아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며 나의 술을 빚을 뿐이다.


만약 지금 할머니가 곁에 계셔 내 술을 맛보셨다면, 아마도 손으로 내 등을 쓰시며

“맛나게 잘 익었다.”

한마디 건네셨을 것이다.

그 한마디면 족하다.

술을 빚는다는 건 앞선 세대를 이기거나 정답을 맞히는 대결이 아니다. 쌀을 씻고 누룩을 버무리는 손끝에 내 간절함을 담아내는, 지극히 마음의 문제다.


매번 술맛이 똑같지 않은 것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 술이 가진 귀한 성정이다.

프랑스의 와인이 해마다 다른 풍미를 ‘빈티지’라 부르며 그해의 태양과 바람의 기록으로 대접하듯, 우리 술 역시 마찬가지다. 쌀이 여문 그해의 날씨와 항아리 곁을 스쳐 지나간 바람의 온도와 습도가 함께 빚어낸 결과물이다. 만약 내가 매번 똑같은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자연과 대화하며 빚은 술이 아니라 규격에 맞춰 생산된 공산품일 것이다.


술이 익어가는 ‘보글보글’ 소리는 항아리라는 작은 우주가 내게 건네는 안부다.

나는 이 가변성 앞에 ‘청출어람’ 대신 다시 한번 ‘가람이청’을 혼자 읊조려 본다. 남색이면 남색인 대로 좋고, 청색이면 청색인 대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 작년보다 조금 탁하면 어떤가. 그 탁함 속에 올해의 비바람이 기록되어 있는데. 할머니의 술보다 조금 시큼하면 또 어떤가. 그 산미 속에 내가 보낸 계절의 고단함이 녹아 있는데.


이 항아리를 비우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단 한 번의 맛. 전통주가 가진 ‘불완전한 완벽함’은 바로 그 가변성에서 온다.

나는 그저 맑은 마음으로, 올해의 바람과 쌀과 누룩이 선사하는 단 한 번뿐인 ‘우연의 일치’를 감사히 받을 뿐이다. 오늘도 나는 맑은 잔 하나를 비우며, 같은 방식으로 빚었으면서도 매번 다르게 피어난 올해만의 향기를 기쁘게 마주한다.

더 푸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맑은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답은 오직 항아리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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