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손, 달콤하고도 무거운 잠의 장막

by 누룩취

병원 문을 나서며 손에 쥔 약봉지 속에는 ‘에피손’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알약이 들어 있었다. 근육의 긴장을 풀어줄 것이라 했지만, 정작 내게 찾아온 것은 거대한 잠의 장막이었다.

약을 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채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는 눅눅한 솜뭉치가 차오르는 듯한 무게감이 내려앉고, 눈꺼풀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한 채 바닥을 향해 속절없이 떨어진다. 급격한 졸음이다. 이 졸음은 단순히 ‘피곤하다’는 느낌과는 결이 다르다.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밀어낼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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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손이 내린 안개에 아스로펜이라는 묵직한 닻이 더해지니, 나의 의식은 수면 아래로 더 깊이 가라앉았다. 통증은 희미해졌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무력한 평온이었다.

약을 복용하는 동안 나의 정상적인 생활은 쉼표 없는 긴 휴지기에 들어간다. 깨어 있으려 애써보지만, 정신은 이미 몽롱한 안개 속을 헤매고, 몸은 비몽사몽의 경계에 걸려 있다. 책을 읽으려 펴 보아도 글자들은 이내 형체를 잃고 뒤섞이며, 아내와 나누던 짧은 대화조차 아득한 꿈결처럼 멀어진다. 통증을 잊게 해주는 대가로, 약은 내게서 깨어 있는 시간의 주도권을 빼앗는다.

병실에서 보았던 그 수많은 ‘아픈 인생’들도 각자의 약봉지에 담긴 이 무거운 잠을 견뎌내고 있었을까. 침상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보면, 약 기운에 취해 잠드는 것이 회복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인지, 아니면 고통을 외면하기 위한 유일한 도피처인지 헷갈리곤 한다.

하지만 이 지독한 졸음 끝에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주 조금이라도 허리의 긴장이 풀려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일상을 마비시키는 이 달콤하고도 무거운 잠의 장막이, 무너진 내 몸을 다시 세우는 단단한 주춧돌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오늘도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약봉지 속에 담긴 그 심연으로 침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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