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술 사이, 그 너그러운 편력(遍歷)

by 누룩취

집안에 은은한 주향이 퍼져나면 비로소 안도한다.

고두밥의 단내와 누룩의 텁텁한 기운이 항아리 속에서 보글보글 숨을 쉬는 소리는 나의 다른 계절이 시작되는 소리이자, 오랜 기다림을 시작하는 신호다.

정성을 다해 술을 빚고 나면 사람들은 으레 묻는다. 직접 빚은 좋은 술이 있는데, 밖에서 파는 술이 눈에 들어오느냐고 말이다.

그럴 때면 나는 그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내 손때 묻은 항아리에서 나온 맑은 청주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나는 편의점 냉장고 한구석에 줄지어 선 장수막걸리를 좋아하고, 차갑게 식은 초록색 소주병의 알싸함을 동경한다.

사람들은 이해할까.

쌀과 누룩, 물로만 빚어낸 그 깊고 순수한 풍미를 두고 왜 굳이 감미료의 달큰함이 섞인 시중 막걸리를 찾느냐고. 혹은 정제된 주정에 물을 탄 소주를 왜 그리 맛있게 들이켜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사람이 어찌 평생 한 가지의 술만 마시고 살 수 있겠는가.

직접 빚는 술이 '정성이 깃든 깊은 대화'라면, 시중의 술은 '부담 없는 농담'과 같다. 공들여 빚은 술은 그 맛이 깊고 변화무쌍하여 한 잔 한 잔에 마음을 다하게 되지만, 가끔은 그 무게조차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주 한 잔의 날카로운 타격감은 복잡한 고민을 단번에 끊어내주며, 톡 쏘는 탄산이 섞인 장수막걸리는 허기를 달래주는 정겨운 동료가 된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변덕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술이란 격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층위다.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내놓는 가양주가 내 삶의 '긍지'라면, 친구와 삼겹살 불판 앞에서 부딪히는 소주잔은 내 삶의 '활기'다.

비 내리는 오후, 파전 한 접시에 가볍게 비워내는 양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는 내 삶의 '휴식'이기도 하다.

더 좋은 술과 덜 좋은 술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그저 '그 순간에 필요한 술'이 있을 뿐이다. 항아리 속 술이 익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편의점의 술을 마시며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랜다. 내가 빚은 술이 귀할수록, 기성의 술맛은 더욱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입안을 즐겁게 한다.


나는 술을 빚는 사람이지만, 장수막걸리도 마시고 소주도 마신다.

사람이 한 가지 술만 마실 수는 없다. 그 순간이 원하는 술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