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이토록 무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불과 한 달 전,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에 119 구급차에 몸을 실었던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 나는 다시 병원복을 입고 침상에 누워 있다. 3년 전의 수술, 이제는 안녕이라 믿었던 고통은, 야속하게도 한 달 만에 내 몸을 이곳으로 밀어 넣었다.
이것도 예습이 가능한 것인가.
급격히 악화되는 통증 속에서도 조금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통증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전에 병원으로 향했다.
앉고, 서고, 걷고, 심지어 눕는 당연한 일상.
그 모든 동작에 비명이 섞여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곳은 병원이다.
MRI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암울했다.
‘재발’.
다시 디스크가 터졌다.
의사는 수술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막막한 진단을 내놓았다.
‘신경차단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주사 치료를 위해 다시 수술대 위에 엎드렸다. 차가운 베드와 익숙해지기 힘든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입원 후 경과를 지켜보며 호전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칼을 대야 한다는 통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통증에 ‘워커’에 의지해 재활치료실로 들어서자, 나를 담당하던 재활치료사의 얼굴에도 절망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의 정성 어린 손길 덕분이었을까, 다행히 통증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가 머문 4인 병실은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진 ‘아픈 인생’들의 집합소였다. 대소변의 장애로 병원을 찾은 40대 가장, 디스크와 당뇨에 시달리며 공항버스를 운전한다는 환갑의 아저씨, 그리고 다음 날 수술을 앞두고 금식 중인 젊은 친구까지.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눈빛만으로 깊은 유대를 나누었다. 같은 곳이 아파본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서글픈 침묵이었다.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는 건 다가올 명절이었다.
장거리 이동은 절대 불가하다는 의사의 확언에 결국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장인어른께 전화를 올렸다.
명절에 자식 얼굴을 보지 못하는 서운함보다, 아픈 자식의 처지를 먼저 걱정하며 안타까워하시는 어른들의 목소리에 목이 메었다.
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깊었고, 장인어른 또한 ‘몸이 우선이지 명절이 무슨 대수냐’고 하셨지만 말끝은 아물지 않았다.
입원 만 하루.
보조기 없이 발을 뗄 수 있었다.
약물과 도수치료의 힘을 새삼 실감하며 저녁 회진 때 퇴원 의사를 밝혔다. 의사는 통증이 잡혀 다행이라면서도, “다시 재발하면 그때는 주사 치료나 시술로는 안 됩니다. 바로 수술해야 합니다”라는 엄중한 경고를 덧붙였다. 퇴원이 결정되었음에도 기쁨보다는 명절 기간 내내 이 연약한 허리가 다시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퇴원 날 아침, 병원의 시계는 새벽부터 바쁘게 돌아갔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활기찬 움직임, 간호사의 규칙적인 혈압 측정, 그리고 병원 특유의 아침 식사까지. 재활 치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짧은 시간 정들었던 이웃 환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쾌차하십시오. 명절 잘 보내시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록 아픈 몸으로 만났지만, 그들이 부디 평범한 일상으로 무사히 귀환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원무과에서 수납을 마치고 나를 데리러 오는 아내를 기다리며 병원 로비를 지켜보았다. 로비에는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통증과 희망을 안고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바라봤다.
비록 내 허리는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을지라도, 오늘 내 힘으로 내디딘 이 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이번 명절, 고향 집 마당을 밟지는 못하겠지만, 부디 이 평온한 걸음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병원 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