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테마 음악

소란의 시대에 고요의 숲을 가꾸다

by 누룩취

심장을 세차게 두드리는 빠른 비트나 고막을 날카롭게 할퀴는 강렬한 사운드는 나의 리듬이 아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우리를 몰아세운다. 그 속도감에 올라타지 못하면 마치 낙오자가 될 것처럼 부추기는 소음의 시대다. 그러나 나는 그 거친 조류에 몸을 싣기보다 길가에 잠시 멈춰 서서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쪽을 택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마른 흙에 스며드는 빗물처럼, 혹은 텅 빈 숲을 가로지르는 서늘한 바람처럼 잔잔히 파고드는 자연을 닮은 것들이다.

때로는 가야금의 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놓일 때의 미세한 진동, 혹은 대금의 마디마디를 통과하며 정제된 깊은 숨소리가 담긴 소리를 즐긴다. 그런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수백 년 전의 누군가와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듯한 묘한 안도감이 든다. 현대의 음악이 화려한 장식음으로 귀를 유혹한다면, 국악의 선율은 소리와 소리 사이의 여백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 비어 있는 공간이야말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여유가 된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듣는 음악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 정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만약 국악과 정적인 앰비언트 음악을 즐기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성품을 대변한다면, 나는 세상의 어떤 풍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아주 진중하고 차분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그 정도로 대단히 진중하지도, 그렇다고 속이 깊어 늘 호수처럼 평온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다. 때로는 사소한 오해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밀려오는 업무 앞에서 마음이 급해져 갈팡질팡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소리의 취향만큼은 고집스럽게 정적인 것을 고수하는 이유는, 내가 그런 성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무례하게 침범해오는 ‘소란’으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소란은 단순히 데시벨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의도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면을 휘젓는 ‘침범’에 가깝다. 가령, 대형 마트의 생선 코너를 지날 때 들려오는 상인의 날 선 목소리가 그렇다. “오늘 갈치 세일!”이라고 외치는 그 톤 높은 목소리의 울림은 내 귀가 아니라 신경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것은 단순히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내 시선을 붙잡고 내 지갑을 열게 만들려는 지독한 호객행위, 즉 타인의 욕망이 실린 소리다. 나는 그 소리에 실린 조급한 에너지가 버겁다. 누군가에게는 활기찬 시장의 풍경이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불협화음이다. 호객행위를 극도로 꺼리는 나의 성향은 아마도 내 공간과 의지를 타인의 침범으로부터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보호하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조용한 음악을 찾는다. 나에게 이 음악들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기 이전에 든든한 ‘백색소음’이다. 세상의 날카로운 소음들과 타인의 과잉된 에너지가 내 은밀한 안식처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부드럽고 투명한 장막인 셈이다. 이 고요한 영역 안에서 나는 비로소 타인의 리듬이 아닌 나의 박동에 집중하며 안전함을 느낀다.

사람들은 흔히 소음이 없는 상태를 고요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고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선택한 소리들로 주변을 채워, 원치 않는 소리들을 밀어내는 상태를 말한다. 낮은 대금 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하면, 창밖의 경적 소리나 이웃집의 웅성거림은 더 이상 나를 방해하지 못하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휴식은 거창한 여행이나 화려한 이벤트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주 작고 정적인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찻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코끝을 스치고, 배경처럼 흐르는 잔잔한 음악이 방 안의 공기를 낮게 가라앉힐 때,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을 내뱉으며 나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곁에 만년필 한 자루가 놓여 있다면 나의 쉼터는 완벽해진다. 종이 위를 스치는 만년필의 사각거림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소리다. 내가 감정의 힘만큼, 내가 움직이는 속도만큼 정직하게 반응한다. 거기에는 호객도, 과장도 없다. 만년필 닙이 종이 위를 스칠 때 나는 사각거림은 그 자체로 훌륭한 악기가 된다. 배경으로 흐르는 느린 선율 위에 만년필의 사각거림이 얹어질 때, 나의 휴식은 비로소 절정에 달한다.

펜을 쥔 손에 힘을 빼고 천천히 문장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음악은 어느새 공기처럼 투명해진다.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상태, 즉 음악과 내가 하나가 되어 흐르는 순간이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란으로부터 격리되어 오로지 나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펜 끝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종이 위로 스며드는 것을 지켜보는 행위는,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흩어졌던 나의 조각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기보다, 내가 머물고 싶은 이상적인 공간에 가깝다.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타인의 높은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국악의 낮은 저음과 자연의 불규칙한 리듬 속으로 나를 숨긴다.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면의 중심을 잡는 능동적인 정적이다.

찻잔을 타고 올라오는 훈기, 눈앞의 하얀 빈 종이, 그리고 이름 모를 연주자가 내뱉는 깊은 호흡. 이 단출한 조합이야말로 소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존중이자, 고독하지만 따뜻한 나만의 테마 음악이다. 이 음악이 흐르는 동안만큼은 세상의 모든 호객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나는 오로지 나의 문장만을 오롯이 써 내려갈 수 있다.

이 고요의 장막 안에서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비록 내일 다시 소란스러운 호객 소리를 마주하더라도, 내 안에는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잔잔한 음악의 숲이 있음을 믿는다. 소란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리듬을 가진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음악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위안이자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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