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되는 비애가 노래가 될 때
음악의 세계에는 ‘샤콘느(Chaconne)’라는 기묘한 형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여덟 마디 남짓한 아주 짧고 낮은 저음의 선율이 지독하리만치 되풀이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바닥을 흐르는 그 베이스 선율은 곡이 끝날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그 완고한 토대 위로 수만 가지의 자유로운 선율이 춤을 추듯 쌓여간다. 아래에서는 변하지 않는 숙명이 흐르고, 위에서는 그 숙명을 해석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 화음으로 피어난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정체가 사실은 거대한 샤콘느의 변주곡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오래전, 나와 인생을 논하던 이는 내가 듣는 샤콘느의 낮은 현악 소리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는 내 방을 채운 그 무거운 선율들을 들으며, 내가 지나치게 비극적인 정서에 침잠해 있다고 믿었다.
“사람은 듣는 음악 닮아간다는데, 왜 듣는 게 하나같이 다 이렇게 슬퍼?”
그 물음은 걱정이었으나, 동시에 오해였다. 다른 이에게 샤콘느는 그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들렸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삶의 비애를 가장 질서 정연하게 정리한 형식으로 들렸다. 슬픔은 감추거나 박멸해야 할 적이 아니라, 낮은 선율처럼 늘 그 자리에 두고 그 위로 새로운 삶의 무늬를 그려나가야 할 바탕이기 때문이다.
샤콘느의 위대함은 그 고집스러운 반복 속에 있다. 만약 바닥을 지탱하는 저음이 사라진다면 그 위의 화려한 변주들은 갈 곳을 잃고 흩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 삶도 이와 같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삶의 근원적인 우울이나 상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샤콘느의 8마디 저음처럼 우리 생의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떠날 줄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이라는 바탕 위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변주를 이끌어내느냐에 있다. 똑같은 슬픔이라 해도 오늘의 내가 얹는 화음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내가 긋는 선율은 오늘보다 깊어질 수 있다.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책상 앞에 앉으면, 나는 나만의 샤콘느를 시작한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스피커에서는 묵직한 첼로의 샤콘느가 흐른다. 그때 나의 만년필은 또 하나의 악기가 된다. 닙이 종이를 스칠 때의 사각거림은 첼로의 활이 현을 긁는 저항과 닮아 있다. 나는 내 안의 낮은 우울 위로 한 줄기 문장을 천천히 얹는다.
종이 위를 흐르는 잉크는 선율처럼 번져간다. 필압을 주면 문장은 단단해지고, 힘을 빼면 가늘게 스민다. 그렇게 적어 내려가는 문장들은 변주가 되어, 내 생의 바닥에 흐르는 슬픔과 조용히 화음을 이룬다.
매일 같은 책상, 같은 펜, 비슷한 음악을 반복하는 일은 무료함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베이스 위에서 새로운 울림을 길어 올리는 일이다. 종이를 긁는 그 정직한 감촉 속에서 나는 오늘도 내 삶의 한 구절을 완성한다.
누구는 음악이 슬퍼서 내가 슬프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그 슬픔의 형식을 통해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슬픔을 무질서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엄격한 틀 안으로 밀어 넣어 예술로 치환하는 과정. 그것이 내가 세상을 견디는 유일한 기술이었다. 펜 끝에서 흘러나온 문장들이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나면, 내 안의 우울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는 괴물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노래가 된다. 샤콘느가 주는 가장 큰 위안은 그 지독한 반복이 결국은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믿음에 있다.
곡의 후반부에 이르면 낮은 베이스 선율은 더욱 묵직해지고, 그 위의 변주들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겹겹이 쌓인 선율들이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며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처음의 그 낮은 여덟 마디로 돌아올 때, 감상자는 비로소 깊은 숨을 내뱉는다. 방금 지나온 그 수많은 소리의 파편들이 실은 저 낮은 밑바닥에서 시작된 하나였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의 하루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낮 동안 겪었던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밤의 책상에서 정리되어, 다시금 내 삶의 정갈한 바탕으로 돌아오기를.
찻잔의 차는 식었으나 마음에는 따뜻한 온기가 남는다. 빈 종이를 가득 채운 검은 잉크 자국들은 내가 오늘 하루를 충실히 변주해냈다는 기록이다. 소란스러운 세상은 여전히 빠른 박자로 나를 재촉하겠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내 삶의 샤콘느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내일은 또 다른 화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잉크를 채운다. 닙이 종이에 닿는 그 정직한 마찰음이 오늘 밤 나의 가장 아름다운 테마곡이다. 반복되는 비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위로 멈추지 않는 선율을 적어 내려가는 것. 그것이 소란의 시대에 내가 고요를 가꾸며 살아가는 이유다. 나의 샤콘느는 멈추지 않는다. 다만 깊어질 뿐이다.
J.S. Bach - Chaconne from Partita No. 2 in D Minor, BWV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