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신다: 내 몸이 기억하는 취기의 기록

by 누룩취

술시(戌時, 저녁 7부터 9시까지), 오랜 벗과 함께 집 앞의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는다. 빈속에 소주 첫 잔을 넘긴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벽에 닿는다. 곧 명치 부근에서 미지근한 열기가 피어오른다. 에탄올 성분이 별도의 소화 과정 없이 위와 소장 점막을 통해 혈관으로 즉시 흡수되었다는 신호다.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근육이다. 하루 종일 모니터를 향해 긴장해 있던 어깨와 목의 근섬유들이 느슨해진다. 혈관이 확장되며 피부 표면의 혈류량이 늘어나고 체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몸은 평소보다 부드러워지며 의자 깊숙이 가라앉는다.


두 잔, 세 잔이 겹치며 혈중 알코올 농도가 상승한다. 알코올이 뇌에 도달하여 전두엽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이성과 통제를 담당하는 회로가 마비되자 평소 억눌렀던 감정이 표출된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많아진다. 뇌 속 도파민 수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하며 고양감을 느끼지만, 이는 뇌 기능의 저하로 인한 통제력 상실일 뿐이다. 사고의 회로가 단순해지며 복잡한 고민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자리를 마치고 일어설 때, 중추신경계의 교란은 극에 달한다. 뇌의 소뇌 기능이 저하되어 균형 감각이 무너진다. 보도블록 위를 걷지만 발바닥에 닿는 지면이 고무처럼 푹신거린다. 일직선으로 걷는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자꾸 한쪽으로 기운다. 시각 정보가 뇌로 전달되는 속도가 느려져 가로등 불빛이 잔상처럼 남는다. 뇌의 정보 전달과 신체의 반응 사이에 시차가 발생한다. 현관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둔하다. 두어 번의 시도 끝에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온다.


잠자리에 들지만 몸은 휴식하지 못한다. 간은 알코올 탈수소효소를 분비해 에탄올을 아세트알데히드로 분해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끌어다 쓴다. 아세트알데히드는 독성 물질이다. 이것이 체내에 쌓이며 안면 홍조와 빈맥을 유발한다. 항이뇨 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되어 체내 수분은 강제로 배출된다. 몸은 빠르게 탈수 상태에 빠진다. 입안이 마르고 심장은 독소를 처리하기 위해 밤새 평소보다 높은 빈도로 박동한다. 깊은 수면인 렘(REM) 수면에 진입하지 못한 채 뇌는 얕은 잠 주위를 맴돈다.


오전 8시.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뇌혈관이 확장되어 맥박이 뛸 때마다 머리 안쪽이 울린다. 입안은 사막처럼 말라 있고 혀는 천장에 달라붙는다. 간이 알코올 분해에 집중하느라 혈당이 바닥을 친다. 손끝이 떨리고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이 숙취다. 어제의 즐거움을 위해 오늘의 에너지를 미리 가불해 쓴 대가가 고통이라는 이름의 청구서로 도착한 것이다.

물을 들이켜지만 위장은 이미 가벼운 염증 상태라 액체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버거워한다. 거울 속에는 부석부석한 얼굴의 내가 있다. 간에서 생성된 독소가 온몸을 순환하며 남긴 흔적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혼자서 집 근처 콩나물 해장국집으로 향한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떠넣는다. 아스파라긴산이 분해를 돕길 기대하지만, 위장은 거부 반응을 보이며 신물을 내뱉으려 한다. 이마와 뒷목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식당 안의 소음이 평소보다 날카롭게 뇌를 찌른다. 감각이 예민해진 상태다. 뇌는 안개에 싸인 듯 멍하고, 어제의 기억은 단편적으로 끊겨 있다. 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휴식임을 알지만, 몸은 당장의 통증을 외면할 지름길을 본능적으로 떠올린다. 중추신경계가 알코올이라는 강력한 진정제에 길들여진 탓이다.

메뉴판에 소주병을 본다. 뇌는 거부하지만 신체는 갈구한다. ‘해장술’이라는 명목으로 한 잔을 주문한다. 투명한 액체가 위장에 닿자마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 유입된 알코올이 중추신경계를 다시 마비시킨다. 뇌는 숙취의 고통을 인지하기보다 새로운 취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머리를 짓누르던 통증이 흐릿해지고, 곤두섰던 신경이 다시 느슨해진다.

손떨림이 잦아든다. 저혈당으로 인한 무력감이 술기운에 가려져 일시적인 활력으로 둔갑한다. 차갑던 손발에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 든다. 이제야 국물 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굳어 있던 표정이 풀린다. 어제의 실수를 반성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다시금 취기의 안락함 속으로 빠져든다.


해장술은 몸을 속이는 행위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다시 상승하며 숙취 증상은 잠시 가라앉는다. 하지만 간은 이제 두 배의 일을 떠안는다. 어제 다 치우지 못한 부담 위에 새로운 부담이 겹쳐진다. 당장의 안락함은 결국 몸에 달아놓은 외상이다. 몇 시간 뒤, 혹은 내일 아침, 몸은 그 값을 이자까지 더해 냉정히 청구할 것이다.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어느새 한낮이 된 햇살이 눈부시다. 술기운 덕분에 비틀거리던 걸음이 잠시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몸은 다시 취기의 궤도에 진입했다. 술은 몸을 빌려 일시적인 해방을 선물하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신체의 정직한 보복이 따른다. 맑은 정신으로 고통을 견디는 대신 마비를 선택한 대가는 오롯이 나의 장기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입안에 남은 독한 알코올 향에 주말의 하루가 증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불편한 다정함: 만년필이 바꾸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