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선(線)이 그리는 계절

by 누룩취

드디어 우리 집에 멈춰 서 있던 시계가 다시 낮은 초침 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집의 시간은 온전히 각자의 것이 아니었다.

무용을 전공하는 둘째의 입시는 가족 모두에게 소리 없는 긴장이었다.

이른 아침, 잠이 덜 깬 아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늦은 밤 찬 공기를 뚫고 다시 아이를 데려오던 길.

왕복의 차 안에서 흐르던 적막과 낮은 라디오 소리는 우리 집 입시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아이가 연습실의 커다란 거울 앞에서 외씨버선 발끝으로 온몸의 무게를 견디며 수직의 절제와 곡선의 인내를 배워 가는 동안, 집안의 공기는 늘 아이의 호흡에 맞춰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큰딸은 동생의 예민함을 침묵으로 배려했고, 아내는 둘째의 멍든 발을 살피며 자신의 안녕을 뒤로 미뤘다.

나 역시 그 고요한 전쟁터를 묵묵히 지키는 파수꾼이자 운전기사가 되어야 했다.

각자의 섬에서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던 시간들, 그것이 우리 집 시계가 멈춰 서 있었던 이유였다.

그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거침없이 돌기 시작한 것은 한 통의 전화로부터였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둘째의 울음 섞인 목소리, 그 떨림만으로도 나는 이미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화면으로 마주한 ‘합격증’은 비현실적일 만큼 선명했다.

나는 아이가 합격한 모든 학교의 합격증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두었다.

그것은 단순히 합격의 증명이 아니라,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렸던 시간과 아이의 이마에 맺혀 흐르던 땀방울, 그리고 온 가족이 유예했던 기쁨의 총합이었다.

차가운 디지털 데이터에 불과할지 모를 그 합격증들이 가족 모두에게 공유되었을 때, 우리 집 시계의 태엽은 비로소 단단히 감겼다.

둘째가 대입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라는 이름의 시분초를 되찾았다. 아이의 흥분이 서서히 옅어질 즈음, 미뤄 두었던 숙제 같았던 ‘첫 가족 해외여행’이 현실의 궤도에 올랐다.

각자의 섬에서 표류하던 네 식구가 온전히 하나의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것은 생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 기적의 정박지는 태국 북부의 푸른 보석, 치앙마이로 정해졌다.

요즘 시대에 거창하게 거실에 지도를 펼치는 수고는 필요치 않았다.

대신 우리에겐 그보다 선명한 ‘살아 있는 지도’가 있었다.

작년, 나와 함께 치앙마이의 골목을 먼저 소요(逍遙)했던 큰딸이다.

아빠와 단둘이 밀도 있게 나누었던 그 이국의 공기를 기억하는 큰딸은 이번 여정의 일등 공신이자 다정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숙소는 올드타운 근처가 좋아. 그리고 아빠, 그때 우리 갔던 온천 기억나? 이번엔 엄마랑 동생도 꼭 그 온천에 가봤으면 좋겠어.”

큰딸은 기억의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조각들을 하나둘 꺼내며 가족의 취향을 세심하게 짚어냈다.

큰딸이 권한 유황 냄새 은은한 산깜팽의 온천수는, 대입이라는 험한 장애물을 넘어왔던 둘째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주기에 제격일 것이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하얀 시트가 기다리는 숙소는, 가족의 뒤편에서 늘 마음을 졸이던 아내에게 건네는 가장 고요한 휴식의 제안이기도 했다.

두 딸은 이제 작은 액정 화면 속에서 자신들만의 치앙마이를 미리 걷고 있다.

큰딸이 추천하는 장소들을 보며 둘째는 초록 넝쿨이 폭포처럼 벽을 타고 흐르는 카페에 마음의 책갈피를 끼워 두고, 낯선 향신료가 가득한 시장의 맛을 상상하며 웃음 섞인 대화를 나눈다.

늘 연습실에서 정해진 동선과 강사의 호통 속에 몸을 맡기던 둘째의 눈동자가, 이제는 이국의 풍경을 따라 자유로운 곡선을 그리며 반짝이기를 기대한다.

여행은 공항의 게이트를 지나기 전, 서로의 목소리가 섞이는 식탁 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마주할 치앙마이는 지금 건기(乾期)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눅눅한 습기 없이 맑고, 아침저녁으로는 기분 좋은 서늘함이 살결을 스치는 계절.

그 투명한 날씨가 우리 가족의 첫 여정을 축복하는 서문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오가는 사소한 참견들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이번 여행은 단순히 치앙마이라는 공간을 향해 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네 개의 선이 다시 만나 하나의 무늬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것을.

큰딸의 경험 어린 다정함과 둘째의 홀가분한 해방감, 아내의 조심스러운 설렘, 그리고 가장으로서 느끼는 묵직한 안도가 한데 섞여 치앙마이의 푸른 하늘 아래 어떤 색으로 번져 갈지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이제 우리는 잠시 낡은 일상을 접어 두고, 코끼리가 점지해 주었다는 그 도심의 붉은 성곽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시계가 아닌, ‘우리’라는 이름의 단 하나의 시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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