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세상 돌아가는 이벤트와는 거리를 두고 유유자적 짚이는 대로 글을 써왔지만, 특별히 배터리 데이에서 섹시한 대표님이 발표한 사업계획의 넌센스를 짚어보고자 플래시 오브 지니어스('08년 개봉)를 소개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영화에 등장하는 밥 컨스는 자동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와이퍼를 원하는 속도로 제어할 수 있도록 실용신안권 정도를 출원한 발명가였다고 한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미국의 대표적인 OEM사인 포드는 이 와이퍼 기술이 새로울 것 하나 없이 기존 요소들을 적용해 만든 조합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밥 컨스 측의 반론처럼 와이퍼와 마찬가지로 전화기, 인공위성들도 이러한 재배열을 통해 발명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가난하지만 신념에 찬 발명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발명가의 특허소송 이야기와는 좀 동떨어지기는 했지만, 최근 배터리 업계에서는 연구개발 및 영업인력을 스카우트해서 수조 원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이 미국 법정이 아닌 무역위원회(ITC)에서진행 중인데, 이번엔 특허가 걸린 소송이 아닌데도 수조 원대의 로열티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전기차 배터리 기술의 인기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재미있는 건 한국에 본사를 둔 두 기업의 소송에서 미국의 OEM사들도 진영을 나누어 GM과 본거지인 오하이오주가 LG 측에서, 포드, 폭스바겐이 SK이노베이션 측에서 산업발전과 일자리 논리로 대리전을 치르는 모양새다.
배터리를 차지하는 자 천하를 차지할 것이다?
폭스바겐과 포드는 기아자동차 니로 EV나 쏘울부스터 EV처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기술을 도입하기로 되어 있고, GM은 현대자동차의 코나 일렉트릭처럼 LG화학의 배터리 기술을 이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소송으로 배터리사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관련 OEM사들의 전기차 사업에 차질이 생긴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LG화학이 영업비밀 침해로 SK이노베이션을 제소한 이후 최근에는 이에 대한 SK이노베이션 측의 증거인멸을 주장하고 있어 법적 분쟁이 마치 기술특허와는 별개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쟁점일 뿐 결국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배터리 '셀' 관련 기술특허를 도용했는지가 소송의 핵심이다.
배터리 데이에 발표된 계획
그러면 파나소닉 같은 배터리사들이 직접 나서서 발표하지 않는 배터리 데이를 떠들썩하게 치러야 했던 테슬라는 배터리 관련 기술력을 어디까지 갖추고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기술력이라면 원천기술과 제조기술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원천기술부터 살펴보자면 테슬라가낸 배터리 관련 특허는 대부분 배터리 관리기술이다. 작은 원통형 배터리를 직병렬로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배치방식에 따른 열 발생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전체 배터리 출력을 어떻게 조절해 에너지 효율을 높일 것인지 등 말이다. 플래시 오브 지니어스의 밥 컨스가 고안한 실용신안권 같은 응용기술이라는 말이다. 물론, 본질적인 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원건도 있지만 등록 여부는 미지수다
또 다른 기술력인 제조기술은 어떨까? 테슬라가 벨류체인 전 영역의수직적 통합을 선포했지만 불가침 영역이 바로 배터리 제조였다. 아직까지 테슬라의 배터리 '셀'은 파나소닉에서 공급받고 있으며,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 삼성SDI 포함하는 이른바 K-배터리를 기준으로 봤을 때 배터리 공장의 Lamp-up을 준비하는데 조 단위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테슬라 라고 해도 섣불리 진출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테슬라의 섹시한 대표님께서 배터리 영역마저 수직통합해서 혁신적인 배터리를 테슬라 라인업에 추가하겠다고 했다면, 영화에서 포드가 밥 컨스라는 발명가에게 꼬박꼬박 지불해야 했던 것과 같은 로열티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에 요구한 조건을 참조했을 때 - 십수조 원을 테슬라 판매량에 비례해 지금의 배터리사 중 누군가에게 지급해야 했을 것이고 또한 배터리 셀 생산라인을 위한 공장 투자에 십수조 원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에 수십조의 투자를 무슨 명목으로 조달할 것인지 의문을 가졌을 것 같다. 유럽에서 차량의 탄소규제를 초과달성해 확보한 탄소배출권을 FCA 같은 OEM사에 판매한 수익으로 근근이 적자를 면한 테슬라의 사정을 알고 있다면 더욱 반문이 됐을 것 같다.(안 했으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영화 플래시 오브 지니어스의 밥 컨스는 자신이 고안한 아이디어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거대 자동차 기업인 포드를 상대해 권리를 주장했다. 포드사 측은 기존 트랜지스터와 다이오드, 모터의 조합인 와이퍼의 구성이 보호해야 할 권리가 될 수 없다고 치부했지만, 법은 많은 위대한 발명품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며 밥 컨스의 주장을 인정했다.
요즘에는 기술을 선점한 선도기업이 패스트 팔로워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허소송을 활용하고 있다. 특허소송에서 지는 쪽은 로열티 지불뿐만 아니라, 창의성이 부족해 선도기업을 쫓는 이등 브랜드로 각인되거나, 심하면 카피캣으로 매도될 수 있다는 리스크가 있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도 배터리 자체생산을 선언했을 때 뒤따를 손해와 이익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잃을 게 없는 천재 밥 컨스의 싸움은 당당할 수 있었고, 테슬라호의 항해를 지휘하고 있는 천재 일론 머스크는얻는 것이 없는 싸움은 피해야 한다.
테슬라의 원통형 배터리
아마 테슬라의 배터리 데이를 지켜보며 묵묵히 웃고 있던 건 파나소닉이었을 것이다.전기차용으로 쓰이는 원통형 배터리 공급사는 흔치 않고, 그렇기 때문에 테슬라가 배터리를 직접 공급하겠다고 했다면 테슬라가 어마어마하게 지불할 것으로 기대되는 로열티 때문에, 혁신적 배터리를 확대 도입하겠다고 했다면 실존하는 아이언맨이 대신 자사 배터리 기술을 홍보도 해주고 구매도 해주겠다는 격일테니까.
전기차가 미래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데 그중에서도 배터리는 핵심기술이다. 배터리 분야에서 혁신적인 원천기술이 등장한다면 테슬라가 말하는 1000마일 배터리도 가능할텐데, 이를 위해서는 반도체 산업과 같이 축적의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