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대중의 추앙을 받는 빌런들이 더러 있었다. 나를 추앙하라는 암시가 없었음에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스토리텔링이 있었던 범죄자들이었다.
때는 대공황의 시기, 은행은 불쌍한 채무자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재산을 회수해 갔다. 빼앗긴 자들에겐 은행은 공공의 적일 뿐이었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일어난 분노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사회에는 존재해선 안될 존재들이었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분노가 번지면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될 수도 있으니 세상에서 사라져야 했다.그들은 금주령과 대공황의 암울함 속에 살던 미국 소시민들에게 일종의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추격대를 피해 도피 중이었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차량이 루이지애나 산골에 들어섰을 때 경찰들은 자동소총과 산탄총 가릴 것도 없이 탄환 150여 발을 퍼부어차량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차량에는 빌런 커플이 탄환을 피할만한 공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끝날 것 같지 않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도피 행적은 이렇게 피범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보니와 클라이드가 최후를 맞았던 포드 차량
보니와 클라이드 같은 빌런이 우리가 사는 오늘날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빗발치는 탄환 앞에서도 코웃음을 치며 경찰들 앞을 유유히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4mm가 넘는 강판을 접붙인 방탄 차량 기술에 의지한 채 말이다.
방탄 차량은 엄밀히 말하면 특장차다. 특수장비로 갖춘 특수한 용도로 쓰이는 자동차라는 의미다. 그래서 OEM사 방탄차 사양을 옵션으로 운영하며 판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외부 전문 업체가 제작하는 경우도 많다. OEM사는 High-end급 차량 한정의 방탄 사양을 제공하는 반면, 외부 업체는 다양한 차량의 베이스 프레임의 종류에 맞춤형으로 제작한다.
방탄 특장차는 베이스 프레임 위에 방탄 바디를 올리는 식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이론상으로 어느 차량이든 제작이 가능하다. 충격을 받으면 휴지장처럼 구겨져 버리는 모노코크와 달리, 베이스 프레임으로 제작된 차량은 하부의 프레임이 충격을 견딘다. 어벤저스에서 닉 퓨리의 SUV가 하부에서 폭발이 발생했어도 구겨지지 않고 똑바로 떴다가 땅에 꽂힌 건 하부의 베이스 프레임이 폭발을 견뎠기 때문이었다.
닉 퓨리의 쉐보레는 하부 폭발에도 꼿꼿했다
방탄차에게 외부 충격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강한 충격에도 관통되지 않느냐에 있다. 이것은 강판의 두께와 강도로 결정되는데, 일반 차량의 도어는 겉보기에 두꺼워 보여도 속이 텅 빈 반면, 방탄 차량의 도어는 4mm 이상의 강판이 20~25조각이 접붙여 만든다. 미국 경찰차도 방탄을 위해 특수합금을 도어 내부에 삽입해 경찰들이 엄폐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원도 역시 일반 유리에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를 덧붙여 만드는데, 일반 유리의 150배 강도로 제작된다. 다만, 장갑차처럼 총알을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탄환의 운동에너지를 흡수해 박히게 하는 원리를 이용해 제작되는데, 최근 경량화가 진행되었다고 해도, 프런트 윈도 무게만 해도 150kg을 훌쩍 넘는다.
이렇게 여차저차하다 보면 방탄차의 중량이 일반차량보다 무거울 것이라는 게 짐작이 될 텐데,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수치를 비교하자면 BMW에서 '09년 제작된 X5 차량의 공차중량이 2,190kg이었는데 이 차의 방탄 버전인 X5 시큐리티 모델은 무려 2,598kg이었다고 하니 약 400kg 정도가 방탄 기능을 위해 추가되었고이렇게 무거워진 중량의 차량을 움직이려면 더 큰 힘과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됐다.
BMW 방탄차 모델 X5 프로텍션 VR6
다시.보니와 클라이드가 방탄차로 도주하는상상을 해보자면, 경찰이 쏟아붓는 탄환으로부터 방탄갑의 보호를 받을 수는 있었던 반면, 무거워진 중량 때문에 차는 동작이 굼떠지고 기름을 많이 먹는 바람에 주유소로 더 자주 해야 하는 중대한 결점이 생길 것이다. 게다가 몇몇 가지 이유로 방탄차량의 최고 속력은 시속 80~100km으로 설정되어 있다 보니 액션물의 추격씬처럼 정부 요원들의 차량을 따돌릴 수 없게 된다.
그나마 내연차량은 사정이 좀 괜찮다. 만약이라도 보니와 클라이드가 전기차나자율주행차를 탄다면 빌런으로써 허세 따위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기차는 경량화 소재를 쓰지 않으면 항속거리가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에 요즘도 범죄 용도의 차량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각종 구동부 제어를 위해 들어간 반도체와 전자장치가 많아 EMP 한방이면 전자 기능이 마비된 좀비 차량이 되어버린다. 자율주행차량도 추돌이나 차선유지 등 기본적인 위험회피 기능이 포함되어 있어 도주 차량의 곡예운전을 원천차단할 것이고 도망자들은 답답함에 차를 버리고 달아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전기차나 자율주행차를 넘어서 향후 미래 차량들은 더 이상 보니와 클라이드 같이 도주형 범죄에는 활용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오히려 OTA 같은 유지보수 네트워크 연결 포인트가 증가해 해킹 위험성이 크고 이로 인해 탑승객이 연루된 범죄보다는 원격으로 차량을 조작해 범죄에 이용하는 사이버 범죄의 수단이 된다고 한다. 그만큼 미래차의 행렬이 거리를 메우는 날이 오면 TV에서 종종 보았던 경찰차와 도주차량의 추격 장면은 빛바랜 영상 기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