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꽃은 핀다 3화
오늘은 니체의 어투를 빌려 힘있게 글을 시작해보려 한다.
기억은 살아있다는 계시이며, 망각은 곧 죽음이자, 죄악이다.
우리가 지친 하루를 매일같이 반복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기억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처럼 기억은 황량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에게 사랑과 같이 매우 강력한 힘이 되어준다. 소설 <기억전달자>에서는 이성만이 남은 마을을 탈출하고, 감정이 남아있는 세계로 향하는 추위와 고난 속에서 기억 하나하나의 따듯함과 힘이 되어주곤 한다. 또 다른 소설 <구토>에서는 구토감을 느끼며 삶에 혼란을 겪던 주인공이 음악을 통해 죽은 이들이 자신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기억은 단순히 하나의 시공간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기억은 힘과 의지의 원동력이며, 더 나아가 살아있는 그 자체이다.
타인을 망각하는 자의 세계에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세계는 그 하나로 귀결된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이나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로 구성된 세계관을 지닌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서 묵살하고, 차별하고, 짓밟는 것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한 이들의 삶은 결코 진정한 실존이 아니다. 그러한 행동은 선악에 앞서 자신을 위해 세계를 왜곡하고, 탄압하는 것은 사막에 사는 사막여우, 미어캣, 오아시스 등을 모조리 부숴버린 채 자신이 좋아하는 북극곰, 펭귄 등을 데려오는 매우 기괴한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사막이라는 세계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며, 그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망각일 뿐이며, 그렇게 제작된 세계는 죽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세계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려 하는 일종의 도피이다. 진정으로 힘이 있는 자는 그 힘을 세계를 억압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 세상과 함께하기 위해 사용한다. 사막 속에서도 끊임없이 걸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사용하며, 사막 속에서 지쳐가는 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되어주는 것으로 사용한다. 그는 억압과 폭력 없이도, 기억만으로 세계의 모든 것이 살아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를 즐기며 살아간다. 비록 그의 육체는 언젠간 죽겠지만, 그는 세계 모든 곳에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그가 기억했던 세계가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것이기도 하다. 결코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물론 혼자서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부류도 존재하지만, 현실과 이상이 분리되어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결코 타인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타인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기억은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헤어스타일을 발견하거나, 누군가 아플 때 그의 건강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에게 힘을 북돋아줄 수 있는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 사소함이 그를 나의 삶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한 기억으로, 그는 나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의 모습에 웃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우리는 서로의 순간을 간직한다. 그러나 지금도 세계에서는 새로운 기억들이 피어나고 있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우리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추억이 담긴 편지 하나 정도는 우리의 삶보다도 더 길게, 어쩌면 영원히 남아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 모두가 우리를 잊더라도, 그 종이 위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것의 진가를 알아줄 누군가를 만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피워낸다면 새로운 세계로 우리의 삶은 계속 이어져나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니체는 여전히 우리의 세계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소설 <구의 증명>에서 기억하기 위해 구를 뜯어먹는 장면이 참으로 철학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설정으로 느껴진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망각이며, 이미 모든 세상이 잊어버린 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구를 그저 빚으로만 생각하는 세상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구는 죽었지만 담의 몸속에서, 담의 기억 속에서 말할 수 있고, 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은 생을 초월한다. 매 순간 살아있으며, 영원히 남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세계를 기억하려 한다. 바다 건너 인간들의 전쟁과 빈곤을 기억할 것이며, 우리 주변의 무너져내려가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 또한 기억할 것이다. 그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기억한다. 또다시 사랑이다. 여러 이유로 인해 헤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과 그리움, 황량함이 남는 것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술을 마시는 것도 그를 추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인터뷰에서 했던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라는 답변이 나에게서도 마침내 살아있는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사랑과 기억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떼어놓을 수 없지만,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20세기 작가와 철학가들이 그토록 삶의 허무함과 인간의 실존적 태도,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였음에도, 21세기에는 깊은 사랑이 주류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작가들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 고민은 사랑에 대한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자신과 세계를 기억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삶이 특정한 이론에 의해서 설명되지 않으며, 이성주의가 무너진 이유도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간단명료하지 않은 사랑처럼, 삶도 표현하기 어려우면서, 근원을 인식하기 어렵다. 따라서 삶이 곧 사랑은 아니지만, 사랑과 삶이 상당히 유사함을 우리는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 한 줄을 더 얹으며 마무리하겠다.
인간은 사랑하기에 살아간다. 그 사랑은 곧 기억을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