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깊이

그럼에도 꽃은 핀다 2화

by 유영

황량한 사막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힘, 캄캄한 바닷속에서도 표류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의지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희망, 믿음, 그리고 사랑과 같은 내면의 어떠한 감정이 우리에게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런 관점을 바탕으로 오늘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랑은 참으로 오묘하다. 나를 사랑하는 것, 어떠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모인 집합체를 사랑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지만, 어딘가 결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하나의 단어로 모인다는 사실은 분명 연결점이 존재한다는 것이기에 나는 그 연결점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지만 밝은 불빛을 발견했다.


최근 헤세의 <싯다르타>와 <황야의 이리>를 읽고, 세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 속에서 타인을 발견하는 그 무한함의 의미를 깨달은 헤세가 영원히 반복될 그의 영원회귀마저 긍정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도대체 왜 그의 다음 작품이 이분법적 대립의 중화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는지 의아함이 있었다. 그에 대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카뮈의 부조리, 반항, 사랑 3단계였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부정과 긍정을 바탕으로 한 정오를 강조했었다. 여기서 정오는 살인과 자살이 하나임을 기억하는 것, 즉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이 동일함을, 더 나아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내면을 향하는 사랑과 외부 세계를 향하는 사랑은 그 방향에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마치 헤겔의 변증법에서 정립, 반정립의 조화를 통해 그 둘이 함께 종합 단계로 어우러지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또한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나와 타인(즉 세계)을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각각의 개인에게 자신과 세계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자신만 사랑하거나, 세계만 사랑하는 것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세계 반대편의 전쟁에 대해서 아파하고, 공감하고, 쓰라린 사람들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반대로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타인들이 자신의 세계에 발 디딜 틈조차 없게 만드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과 세계 사이의 우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대립은 결코 하나의 승리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오의 초심을 잃는 것이며, 그 상태에 빠진 우리는 결코 진정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사랑은 진정한 의미를 반도 채 못 담고 있는 것이다.


언어에는 깊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를 쉽게 느끼곤 한다. 말만 던지는 가벼운 사과, 진지한 고민에서 나오는 무거운 사과, 감정이 담긴 슬픈 사과처럼, 하나의 단어는 결코 획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초인이 아니기에 그들처럼 저마다의 가치 사이의 우월을 완전히 초월할 수는 없다. 그를 향하는 길목에 있는 인간은 그저 자신에게 없는 것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분명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나는 세계 속에 있고, 세계는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랑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사막과 바다에서 외롭지 않을 것이다. 모래 알갱이에도, 바닷물에도 나와 네가 언제나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랑하기에 황량함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기에 결코 외롭지 않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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