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꽃은 핀다 4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요즘 내가 삶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에 대해 풀어보려고 한다. 우선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어떠한 의미를 쫓아가며, 그를 향해 살아가는 사람. 두 번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며, 시간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들의 가장 큰 차이는 삶의 의미의 유무가 결정한다. 과연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긴 한지, 우리는 왜 사는 것인지하는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매우 깊고도, 진지한 물음이기에 이에 대해 수많은 생각이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어렸을 때 삶에는 어떠한 의미가 반드시 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그 당시 봤었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작품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 어떠한 믿음이나, 태도를 이어갈 것이라는 그들의 의지를 많이 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삶은 각자만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선한 길은 반드시 아름다운 결말을 맞을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선’이라는 개념이 조금씩 붕괴하였고, 세상에 대한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 매일 반복되는 공부나 일을 하면서 이런 삶이 과연 좋은 혹은 선한 삶인지, 나는 의미를 피워내지 못할 그저 평범한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의 씨앗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쯤 <데미안>을 다시 읽었고, 얼마 지나서 <싯다르타>를 읽었다. 책에서 헤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을 지속하던 <데미안>에서, 헤세가 본 투쟁의 끝은 아브락사스라는 모순을 향했었다. 그리고 <싯다르타>에서는 강물의 흐름에서 악인과 선인의 삶이 모두 함께 어우러짐을 보여주었다. 헤세는 아마도 삶에 대한 투쟁의 끝에서 모순이라는 모호함을 느끼곤, 그 속에서 마침내 모든 삶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삶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정해진 삶의 정수란 없으며, 방황과 흔들림조차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임을 일깨워준다.
책을 통해 작가와 그를 둘러싼 세계 속의 삶을 경험하는 나에게 서머싯 몸, 알베르 카뮈, 그리고 헤르만 헤세는 모두 각자만의 다른 방향으로 걸어감에도 그들이 하나의 구 위에서 걷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의 이름을 찾을 수 없어서 베케트의 표현을 빌려, 구는 한 조각의 빵이 될 수도, 희망이 될 수도 있다고 했었다. 최근에야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삶’이었다. 우리는 살아가기에 그 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을 단순히 한 단어로 정의할 수도 없다. 내가 이전에 부여했던 불완전한 이름들은, 그것의 전부가 아니라 한 조각에 해당할 뿐이었다. 인간에게는 완벽한 악도, 완벽한 선도 없기 때문에 삶이란 참으로 모순적이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타인의 조각들이 모두 담겨있는 것이다. 이것이 헤세가 고타마의 미소에서, 강물에서 모든 이들의 삶을 느꼈던 이유이다. 나는 곧 세계이며, 세계는 곧 나이기에 나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과 동시에, 모든 의미를 지닐 가능성으로 인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무의미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의 매 순간은 새로운 의미를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걸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인 것이다. 때로는 좌절하고, 외롭더라도, 또 언젠가는 기쁘고, 황홀해질 것이다. 마치 계절이 돌아오듯 우리의 삶도 꾸준히 순환하며 무한함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고 싶어졌다. 그와 완전히 동일한 맥락에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을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즉, 우리는 어떠한 정해진 본질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매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의미를 피워내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삶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따지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