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꽃은 핀다 5화
우리는 행복을 위해, 불행을 버티며 매일을 살아간다. 지하철 손잡이가 덜컹거리는 진동에 따라 우리도 매일 흔들리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이러한 일상이 참으로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우리에게 다가오기는 할까. 이러한 고민에 대해 우리에게 익숙한 시 한 편으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어쩌서 김영랑은 모란이 피었을 때의 행복과 지고 났을 때의 불행을 모두 알면서도, 긴 삼백예순날을 단 며칠을 위해 버티고 버틸 수 있었을까. 그의 모란, 행복, 이상에 대한 추구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러한 지향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다시 지금의 고통이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다. 이상과 현실은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상을 지향하는 자는 현실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에게 이상은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서 순간적인 행복과 그 전후를 감싸는 아픔으로서 느껴진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현실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더 나은 무언가를 지향하는 한, 우리는 그 현실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이 괴테의 "인간은 지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구절과 카뮈가 그린 페스트가 창궐함에도 벗어날 수 없는 오랑시의 모습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지향에서 오는 부조리의 감정을 피해야 할까. 아주 오래전에 살던 에피쿠로스는 피하자고 주장할 것이다.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으나 그 시대의 불행에 대한 인식과 오늘날 불행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모란에게 기쁨과 슬픔이라는 상반된 정서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단편적인 감정이 아님을 의미한다. 행복의 그림자는 불행이며, 불행의 그림자는 행복이다. 즉,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 속에서도 불행을 느낄 수 있지만, 역으로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 무료함 속에서도 일종의 사소한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것. 그것이 니체의 위버멘시가 영원회귀 속에서 살아가는 힘이며, 헤세의 최후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우리의 일부분이다. 우리의 신체 중 어느 하나라도 잘라서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아픔 속에서도 기쁨의 단 맛을 느낄 수 있는 힘이며, 그것은 그 모든 감정이 '나'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불행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