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읽고
반항하는 인간세계는 아름답고, 인간은 잔혹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최근에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을 5일에 걸쳐 끝까지 정주행을 했다. 대사와 장면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사유의 깊이와 진한 의지와 본능적 떨림에서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이 계속 떠올랐다. 어째서 인간은 왜 이토록 잔혹하고, 세계는 왜 그토록 아름다울까.
사실 작년에 이 책을 읽을 때 카뮈에게 화를 많이 냈었다. 자살보다 삶을 택했음에도 왜 인류의 모든 반항에 실패를 선고하는지에 대해 답답함이 가득했다. 이런 허무함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이럴 바엔 모든 이해를 포기하고, 하루하루의 쾌락에 취하는 철학적 자살을 택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양의 근대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당대의 여러 문학과 철학을 접하면서 그와 조금씩 동화되어 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오늘은 그러한 고민들에 대해 정리해보려 한다.
왜 시지프스는 영원히 돌을 굴리는가
이 질문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될 수 있다. 시지프스의 돌 굴리기가 특정한 시점에 국한된 목표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 우리는 카뮈의 반항 정신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반항은 한 번의 성공을 향해 있지 않다. 책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반항은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러나 점점 더 고도화된다. 마치 함수들의 수렴 성질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계속해서 다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카뮈 또한 반항이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역사성의 흐름에 기대지 않고자 했다. 인류의 반항의 역사는 혁명으로써 계속 이어져 내려오지만, 그 혁명의 날을 쥐고 있는 것은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매 순간마다의 부조리함에 대응하는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조리함은 왜 결코 사라지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니체의 위버멘시를 넘어선 존재가 되거나, 진정한 반항인이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민족, 종교, 국가, 권력, 성별 등의 이유로 편을 나누거나 분쟁을 이어가지 않게 된다. 그러나 현대인의 대부분은 그러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의 영웅은 누군가에겐 죄인이 되며, 우리의 죄인이 누군가에겐 영웅이 되는 세계의 아이러니 속에서 무너지게 된다. 이 점이 바로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열쇠이다. 세상에 대해 무관심했던 뫼르소와 그의 속마음에 대해 무관심했던 세상.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절대적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없이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약간의 차이로써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반항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시지프스는 왜 필연적인 부조리함에도 포기하지 않는가. 그건 바로 일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행복하지도, 또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다. 20대가 되면 10대가 좋았지, 30대가 되면 20대가 좋았지라며 과거의 일상들에 대해 초연할 수 있는 건 그러한 일상이 결코 우리에게 무의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 무의미할수록 우리는 그 위에 더욱 많은 가치를 피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뮈는 자살을 택하지 않았다. 영겁의 사막이라도 살아서 의미를 만들고자 했다.
지금 우리의 반항은 무얼 향해있는가
그렇다면 두 번째 물음은 자연스럽게 지금 이 순간의 반항을 향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부조리는 무엇인가. 특히 한국에서의 부조리는 무엇인가. 교육, 정치, 권력, 자본, 성별, 지역, 종교, 세대, 서열화 등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모든 분류체계가 불러온 문제이다. 우리가 반항인이라면 이러한 무분별한 편 가르기에 대한 붕괴를 지향해야 한다. 지난 20세기 세계 전역을 휩쓸었던 68 혁명이 한국을 넘지 못했던 한계를 이제는 극복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독립을 위해 전체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으며, 민주화를 위해 부당한 권력과 독재에 맞서 싸웠다. 이처럼 전체성과 보편성은 인간실존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벽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모든 반항은 반항집단과 피반항집단으로서 그들만의 이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반항은 새로운 보편성을 낳는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이 지난 100년간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겪고도 또다시 전쟁이 전쟁이 발발하고, 패권주의가 부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반항인은 모든 것에 대해 반항해야 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사실 외의 모든 것에서 독자성을 지니고, 반항해야 한다. 루소가 말한 개인과 집단의 개념에서 더욱 확장되어, 각 개인은 인간이라는 집단을 정의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 모든 울타리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스스로를 긍정해야 한다. 그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살아있음 외에 어떠한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음을 모두가 이해할 때 비로소 인간은 첫 번째 알을 깨부수게 된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아직 한참이나 남았으며, 어쩌면 마지막 인간조차도 내딛지 못하는 영역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을 꾸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담대하게 꿈을 꾸고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3000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철학이라는 기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달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