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넘어설지, 잠식당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피케티와 샌델의 기울어진 평등을 읽고

by 유영

현대 사회의 과잉생산, 경쟁 자본주의는 크게 세 가지의 문제를 지닌다. 첫 번째는 인간이 자본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경쟁이 만들어낸 우열이 정당화되어, 권위주의와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마지막은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경제가 발전하였음에도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피케티와 샌델은 평등, 능력주의, 국가주의 등의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개진한다. 정말 수많은 논의들이 오갔지만,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은 자본과 권위의 본질에 관해서이다.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기계처럼 일하는 우리들에게 이 질문은 섣불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었다. 왜 우리는 자본을 도입하고, 이를 권력으로 확장하여 정당화하였을까. 부유한 국가가 가난한 국가의 의견을 무시하는 세계. 부유한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기 어려운 사회. 현대사회는 200년 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자본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버려서 그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경쟁 자본주의는, 경쟁을 평등과 공정이라는 개념으로서 정당화한다. 하지만,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했듯 우리는 단 한 번도 평등한 출발점에서 함께 출발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성공은 바로 행운에서 비롯된다. 생물학적인 능력의 행운, 부모의 자본과 권력이라는 행운, 자신과 맞는 시대와 사회라는 행운 등. 우리는 능력주의, 경쟁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우리는 행운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가장 큰 기둥인 무한 경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것이 공정했다면, 북반구와 남반구의 심각한 경제적 수준의 차이,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과 피해의 차이, 자본가와 노동자의 영향력의 차이들이 결코 이렇게까지 극단화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따라서 현재의 자본주의는 완전히 썩어버렸다. 특히 미국식 모델을 받아들인 우리나라의 경우, 봉건식 자본주의 체제로서 너무나 뒤처진 사회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노동시간이 생산력과 직결한다는 구시대적 발상이 정치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깊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2시간의 점심시간을 가지고, 근로시간이 OCED 평균보다도 낮은 유럽 국가들은 왜 G7 국가가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심각한 수준의 노동착취를 진행하면서도 우리의 반 정도밖에 일하지 않는 유럽을 따라가지 못할까.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노동시간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가오는 AI시대에 단순한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이 할 필요가 없다. 로봇 기술의 발달과 데이터 마이닝과 머신러닝 기술의 발달로 기본적인 노동은 모두 기계가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반에서 쏟아질 수많은 실업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새로운 시대에서도 여전히 노동시간이 중요하다고 외칠 것인가. 이제는 인간다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역사적으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하게 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재화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접근성과 효용을 높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산업혁명은 인간의 삶의 수준을 개선하고 더욱 효율적인 생산을 통해 휴식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공지능 혁명도 무자비한 노동착취를 해소하기 위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물질이 인간을 이끌어주는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이제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이끌어야 한다. 국가주의와 패권주의에 맞서 세계주의를 내세우고, 사회적 독재와 부의 대물림에 맞서 진정한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내세워야 한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한 대입 추첨제는 이미 독일에서 유사한 모습으로 시행되고 있다. 일정한 자격요건을 맞춘 이들에게는 누구나 원하는 학교와 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추첨제도는 단순히 평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한 문제를 더 맞혀서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들이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정당화하는 것에는 그들 스스로의 운을 잊은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첨이라는 행운을 통해 일깨워 준다. 또한 지나친 학업 경쟁으로서 학생들을 학교라는 전쟁터에 보낸다는 인식이 아니라, 학교에서 함께 서로를 도와주고, 각자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준다. 이는 교육의 핵심과도 직결되는데, 교육은 단순히 수치상의 점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선생의 수업 내용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빼곡히 필기하고, 작품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당연한 듯 암기하는 수직적, 무비판적 한국 교육은 결코 다가올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선생과 학생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동반자임을 이제는 인식해야 할 때이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한다. “우리는 왜 돈을 버는가. “ 여전히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이제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가 어쩌면 구시대적인 논리에 완전히 세뇌되어 현재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 벌어도 벌어도 부족한 자본주의라는 자전거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멈추는 순간 옆으로 넘어지기 때문에 끝없이 경쟁하고, 생산해내야만 한다. 그런 광기를 이제는 끊어야 할 때이다. 세계를 뒤흔드는 전지구적인 위기 속에서 아직도 종이조각에 빌빌 거리고, 다른 집단의 목소리에 대해 비난하고, 편을 가르는 인간의 모습은 너무나 한심하지 않은가? 기후 위기의 현실화로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르는 우리는 앞만 보고 달리는 자전거에서 내릴 필요가 있다. 속도를 줄이고, 넘어지는 아픔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볼 때이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전거에 넘어지는 것이 두려울 수 있지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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