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토머스 게이건의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by 유영

1. 도입

지난 겨울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왜 이토록 잔혹하고 부조리한가, 동시에 세계는 이다지 아름답고 따사로운가.” 그의 말처럼 오늘날의 사회는 매우 위태롭고, 불안정하다. 나는 그 원인이 인간성의 상실이라 생각한다. 어째서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는가. 아니, 더 정확히는 빼앗겼는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돈’과 ‘권위’라는 가치체계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아름다움이 남아있다.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퇴근 후 가족들과 공원으로 나들이를 나온 가장의 웃음에서, 밤새 시험공부를 하다가도 잠시 산책하며 즐거움을 느끼던 우리의 추억에서 우리는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나는 그간 일상 속에 담긴 소소한 행복마저 수치로 평가하려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 대한 고찰을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을 바탕으로 논해보고자 한다.


2. 인간다운 사회를 향해

이 책을 읽는 내내 ’인간성’에 대한 고민이 머리속을 맴돌았다. 자본주의는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사회 체제가 되었으나, 그것이 현세대 인류의 진정한 성격을 반영한다고 보기 어렵다. 좁은 동물원에서 죽은 고기를 먹는 사자들이 강압적으로 조련 당하는 모습을 힘의 논리로 정당화 하고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않는 사회,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세뇌하고, 몰락시키는 것마저도 그저 돈과 권위로서 정당화하는 세계는 철저하게 포식자만을 대변한다. 이러한 오늘날의 사회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포식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상위 1%를 넘어 상위 0.01%에 해당하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극소수만이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곳을 향한 인간 대다수의 지향이 정말로 인간의 본질일까? 이는 단순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롭게 탄생한 오늘날의 경쟁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본질을 잊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실존의 방향은 무엇인지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는 미국이라는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길러진 인물이지만, 유럽의 인간다운 사회민주주의를 접하면서 그간 자신의 눈을 매혹하던 돈과 권위의 원천을 서서히 인식하게 된다. 흔히 우리는 ‘잘 산다’라고 했을 때, 경제 지표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이번 대선 토론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수 진영의 세 후보가 이러한 관점에서 공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경제를 나타내는 숫자가 좋아질수록 우리의 삶이 정말 나아질까? 여전히 밤마다 지하철 역에는 노숙자들이 있고,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취업을 걱정하고, 대학을 진학하지 않으면 무시하는 시선에 등떠밀려 진학한 학생들의 등록금 대출은 그들의 숨통을 조르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경제가 무척이나 발전했는데, 우리의 삶은 변함없이 고달프다. 저자는 이러한 경제 수치의 아이러니에 대해 평균의 눈속임으로서 설명한다. 미국이 G1으로서 지니고 있는 강력한 힘은 바로 그들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구성원들이 몰락하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반면 미국과 경제지표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독일은 1년간 6주 이상의 휴일을 꽉꽉 챙기면서도 비슷한 생산력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불평한다.


두 국가의 차이는 경쟁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유럽 모델은 수렵/유목 모델과 비슷하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만, 미국 모델은 농경 모델처럼 일자리의 질보다는 양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라는 문장이 매우 와닿았다. 그간 나는 수렵에서 농경 모델로 사회가 전환한 것은 기술의 발전으로서 외부에 의한 위협을 줄이고 인간의 나은 삶을 위한 효율 추구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기술 발전으로 루소가 말한 자연 상태의 타락 과정처럼 ‘더 많은’, ‘더 빨리’와 같은 수식어와 함께 효율과 잉여를 지향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전쟁과 갈등이 발생하였다는 점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오늘날에도 그 결과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 꼭대기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본질이 왜곡된 것이다. 대선 토론에서도 주 4일제와 관련하여 임금 삭감을 거론하거나, 줄어드는 근로시간으로 어떻게 중국의 빠른 성장을 따라가겠냐는 후보의 발언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충격적이다. 한때는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던 자가 포식자의 위치에 서게 되자 그들의 낡아빠진 관점을 대변한다는 점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책에서 절름발이 독일과 전속력으로 달리는 미국이 비슷한 경제적 성과를 내고 있음이 반복적으로 제시되지만, 아직도 저런 발언을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는 포식자들의 논리에 깊게 세뇌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는 평균이라는 환상을 도입하여 대부분의 국민을 기계부품으로써 착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겐 인간적인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 부품처럼 길러진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학생들이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모르겠다.”라고 답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가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었을까. 나는 책 속에 드러난 독일인의 일상적인 문화와 유연한 사고방식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독일은 근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와 이사가 1:1로 이사회에 참여하여 동등한 의결권을 지니게 되었고, 학교 교육은 쓸모 있는 획일화된 기계 부품을 만들기 위한 공장식 평가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힘을 기르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시험이 끝나면 내용을 잊어버리고, 졸업을 하면 더 이상의 공부와 자기 계발을 원치 않는 미국과 우리나라의 학생들과 다르게, 독일인들은 졸업 이후에도 신문을 읽고,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문화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런 면에서 굉장히 보수적이다. 학교 현장에서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할뿐더러, 세대간, 성별간, 지역간, 학벌 등과 같이 인간을 둘러싼 관점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모든 분류 기준을 종합했을 때의 결과가 동일한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특별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간다는 공통점 외에는 그 어떠한 공통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르기에 존재한다. 부차적인 기준으로 편을 가르는 문화는 너무나 원시적이다.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사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하는 독일 제도와 사회 모델은 현시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인들의 사유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독일 모델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이 독일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사회에 대해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준다. 평범한 시민들조차 독일 정부의 기초 과학 정책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현재의 사회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나은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실존적 의지가 존재한다. 카프카의 <성>에서 묘사된 것처럼 우리가 ‘성’이라는 하나의 지향에 도달하는 길은 시간에 따라, 접근 방법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이는 인간 실존의 영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독일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역사와 철학에 대해 의논하고,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외친다.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변화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선과 악, 공정과 차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데미안과 싯다르타가 향했던 실존의 여정 끝에는 아브락사스와 강물이라는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인간 그 자체가 담겨 있었던 것처럼, 실존을 넘어선 연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편 가르기가 아닌, 모두를 위한 수렴적 상향성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향한 독일인들의 문화와 제도에 대해 우리도 지속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마무리

현대 사회에서 1인당 GDP가 아무리 높아져도, 모든 인간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 경제 가치는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만 해당 지표의 우위가 결정되는 상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경쟁 구조를 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경쟁은 인간을 포식자와 피식자로 분리했으며, 이는 결국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졌다. 우리는 경쟁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는 없는가? 서울대를 가지 않으면 삶이 불행해지는가? 이러한 인간다운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는 사회는 대체 무얼 위해 달리고 있는가.

필연적으로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인간은 저마다의 지향으로 향하는 길이 존재하지만, 경쟁 사회는 그 모든 길을 돈과 권위라는 하나의 기준만으로 수치화하고, 평가한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다시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는 68정신처럼 길을 막고 있는 수많은 장벽을 다시 하나씩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한 인간의 실존을 향한 투쟁은 결코 독일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류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끝없이 갈등만 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 옆에서 우리도 함께 돌을 굴리며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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