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아니면 국가나 특정 집단을 위해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 삶의 본질일까.
혹은 그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함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일까?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행동이 아니다."
실존과 허무는 면도날의 얇은 두께보다도 날카롭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긍정적이고 쾌활한 감정으로 삶을 바라봐야만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흔히 부정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피하려는 태도를 지닌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결코 진정한 자아를 깨어나게 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삶의 의미는 하나뿐이라는 것, 즉 산다는 행위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가 말하는 삶이란 힘을 지닌 자아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곤 한다. 자유에 뒤따르는 책임은 삶 전체를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으로 바라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삶의 무의미함과 방황감,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권위에 인간은 부딪히기보다는 그것에 좌절하거나, 복종하거나, 혹은 아예 망각해버리는 길을 선택한다. 지난 역사에서 히틀러라는 강력한 파시스트가 탄생했던 것도, 대중들이 산업과 자본의 발달로 주어진 자유를 충분히 누릴만한 내적 성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가 안정을 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강력한 통치자에 의해 지배받고,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 아래에서 유대를 형성하여 안정감을 느끼길 바랐다. 이와 함께 외부의 나약한 적들에 대해 가학을 저지르며 내적인 불안을 지속적으로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군주제와 종교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이제 자본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다. 이는 자본을 활용하여 자유를 누릴 여건이 충분히 갖추어졌으나, 인간들은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지난 역사 위에서 인간은 점차 자유에 다가갔으나, 여전히 그것은 소극적인 자유였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느끼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온 사회의 기대와 압력에 서서히 길들여진 사회적 자아라는 허물을 벗겨내고, 그 속에서 햇빛을 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는 '나'를 긍정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긍정함으로써 세계를 동시에 긍정할 수 있는 사람. 둘이 하나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 속에서는 둘의 개성이 존재하는 사랑. 전체와 부분이 함께 존재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은 스스로의 믿음에 따라 행동하며, 그 신념은 자기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그를 둘러싼 세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은 다시 세계와 동화되는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전의 자연화와 달리 개인이 존재한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에리히 프롬의 분석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심리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했다고 느껴진다. 또한 철학과 사회를 인간 심리를 이용하여 연계함으로써 철학을 둘러싸고 있던 일종의 성역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결국 철학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며, 인간은 곧 사회를 움직이기에 사회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철학은 반쪽짜리 철학이 된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인간은 양가적이기에 그들이 구성하는 사회 또한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이성의 눈으로만, 의지의 눈으로만 개인과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감각으로 느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살지 못한 세계를 느끼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얘기한 것도, 책의 관념을 무작정 수용하는 것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내면의 힘이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지키고, 기도를 하는 행위보다 그러한 행위에 대한 동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데미안>의 마지막 장면에서 싱클레어가 자신에게서 데미안을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타인과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야 말로, 에리히 프롬의 기대가 결코 이상적인 꿈만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