셍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고
어린왕자는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지난날들에 대해 여섯 행성의 어른들처럼 살아왔다. 우린 일상에서 흔히,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는 말을 일상에 쓰곤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의미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우리는 어린왕자가 지나간 여래 행성의 어른들을 보며, “저들은 왜 저럴까?”하는 비판의식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며, ‘모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무튼 우리는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어른이다. 더 명확히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세상을 무관심하게 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세계를 그저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는 왕, 모두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찬양해주기를 바라는 허영쟁이, 세계에 무관심한 술꾼, 세계를 소유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업가, 세계에 대한 아무런 인식과 작용없이 단순한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가로등 키는 사람, 마지막으로 그저 지리를 알기만 할 뿐, 그것을 경험하려는 의지가 없는 지리학자. 그들과 우리는 철저히 세계를 대상화하고, 타자화 한다. 그들의 이야기와 우리 사이에 형성된 거리감으로 인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모두 세계의 결과에 집중할 뿐, 세계를 길들이는 시간의 무거움을 알지 못한다. 이는 “자기가 길들인 것 밖에는 알 수 없는거야.”라는 여우의 대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처럼 세계를 타자화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할 때, 완벽하게 무지하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사막이 가장 편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저 모래밭만이 보일 뿐이니까. 우리는 그곳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작중의 나에게 그 사막의 풍경이 특별한 이유는 어린왕자와의 관계를 통해 그 장소에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린왕자에게 장미가 특별한 이유는 그들의 의식적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이미 서로를 길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바오밥나무와 화산을 대하는 어린왕자의 태도는 세상을 대하는 여섯 어른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결국, 길들인다는 것은 대상과 관계를 맺음을 넘어, 충만한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번 스스로 질문해보자, 우리는 이 이야기가 어린왕자에게 장미처럼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우리는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가장 중요한 건 보이지 않아”라는 어린왕자의 말처럼, 우리가 세계를 대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들의 심연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책을 읽은 소크라테스가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잠수부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파스칼이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다니지 말고, 텍스트에 몸을 던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사막의 모래 언덕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보물을 바라봐야 한다. 내 옆의 타인에 대해서도, 문학과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그들의 심연에서 헤엄칠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선, 평범한 어른들처럼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는 선입견과 편견, 무관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정말 모자를 표현한 것일지, 다른 의미가 있을지 세계의 심연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 순간, 뒤샹의 <샘>은 소변기가 아닌, 뒤샹의 삶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제 결말로 향해보자. 왜 어린왕자는 죽음을 택했을까. 먼저 구조적으로 바라보자.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은 대체로 가장 강력한 의지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다. 그렇다면 왜 생텍쥐페리의 결론은 이렇게나 강렬해야 했을까? 그 이유는 역시나 세계대전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 사회는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 속에서 자신의 친구, 가족, 연인을 상실하고 나서야, 그간 대상화했던 세계가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참으로 늦은 후회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떠나왔으며, 이때에 느껴지는 과오에 대한 후회와 반성, 자신의 상실에 대한 고통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의 폭발을 경험했으며, 그것을 하나의 결말로서 표현하기 위해선, 죽음이 가장 적절했을 것이다.
이젠, 좀 더 작품에 다가가보자. 작중 수많은 어른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취해있다. 별을 세는 행위에, 가로등을 끄고, 키는 행위에, 술을 마시는 행위에. 진격의 거인에서 “다들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거야”라는 대사처럼, 현대인은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의식이 살아있는 그 순간, 우리는 평생 헤엄쳐도 이해하지 못할 세계의 심연 앞에서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의 논증처럼 인간은 그러한 자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피를 선택했으며 그 결과 저마다의 취함을 통해 의지할 대상을 찾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 “하늘을 보라. 그리고 생각해보라. ‘양이 꽃을 먹었을까 안 먹었을까?’라고, 그러면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어른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린왕자의 죽음을 후회로 인한 실패라는 고전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으며, 육체를 초월한 의지라는 측면에서 보다 낙관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 결론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왕자 이야기를 읽었지만, 여전히 이 이야기를 하나의 픽션으로 인식하고, 교훈과 메시지를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의 어린왕자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가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왕자와 양, 그리고 장미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르헤스가 말한 말처럼 한 권의 이야기는 책장을 덮으므로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어린왕자에게로 달려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