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엇을 믿으며 살아가나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by 유영

요즘 들어 매일같이 들려오는, 세계 곳곳의 전쟁과 내전, 혐오와 차별, 분쟁과 불평등은 세계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악한 존재이지 않을까? 그들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태도일까?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게 된다. 끝없는 고민은 대체로 허무함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허무 속에서 저항하려는 소수의 외침은 결코 무의미한가. 카프카의 <소송>에 묘사되는 K의 반항과 죽음처럼, 그저 벗어날 수 없는 족쇄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우리는 어떠한 믿음에 대한 씨앗도 발견하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파멸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살아가고 있다. 2000년 전부터 세상에 대한 부정적 관점과 염세주의가 있었으나, 인류는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 왜일까. 인간은 어째서 최악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를 따라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까. 왜 현존을 택했을까.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해 톨스토이가 내놓은 대답은 '신앙'이었다. 무언가를 믿는 태도는 인간이 경험하는 매 순간에 걸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빅터 프랭클이 의미에 대한 의지를 통해,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삶을 유지했던 것처럼, 우리가 부여한 의미가 삶의 기저가 된다.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작품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키팅 선생은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이처럼 말한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이다."


우리의 삶의 이유는 시가 있기 때문이며,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며, 낭만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현존하는 이유이자, 삶의 의미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인용된 휘트먼의 시 중 일부를 보자.


오, 나여! 오, 삶이여!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질문들

믿음없는 자들의 끝없는 행렬에 대해

어리석은 자들로 가득 찬 도시들에 대해

이것들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답은 바로 이것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

삶이 존재하고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장엄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도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는 것

<오, 나여! 오, 삶이여!>, 월트 휘트먼


이 시를 통해 우리는 톨스토이의 기나긴 고민과 해답을 가슴으로 단번에 느낄 수 있게 된다. 세계는 참혹하고, 절망적이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연극은 결국 한 편의 '시'가 될 것이라는 말에서 결코 현존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현존에 대해 의미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보다 쉽게 비유하면, 흘러가는 강물에 그저 멈추어 서있더라도, 그러한 모습은 누군가에겐 세계에 저항하는 모습으로서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이다. 톨스토이의 현존은 무엇이었는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잠시 톨스토이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톨스토이는 높은 지위에 있는 성직자,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들에게 삶의 의미의 근원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시도했으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그들에게 반발감만이 생길 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형식적으로 살아갈 뿐, 그들의 행위에 가장 근원적인 기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톨스토이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귀족, 성직자들보다 더욱더 참된 신앙의 태도로 삶을 살아감을 발견한다. 톨스토이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자신을 포함한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의 허울만 좋은 모습에 대해 비판하며, 자신의 과거를 반성한다. 그리고 그간 지녀왔던 스스로의 오만함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부유하고 많이 배운 우리 계층 사람들의 생활이 역겨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활은 나에게서 모든 의미를 잃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 모든 논증, 모든 학문, 모든 예술이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였다. 이런 것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노동을 하며 스스로 삶을 창조하는 민중의 행위야말로 참된 것이었다. "


그리고 톨스토이는 민중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바라본 세상과 삶에 대한 자신의 논증이 결코 인간 전체를 대변하지 못했음을 깨닫고는 이와 같이 말한다.


"내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린, 삶은 악이라는 해답은 아주 옳았다. 다만 나에게만 해당되는 그 해답을 모든 사람의 삶 전반에 적용한 것이 옳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는 이성이 아닌 또 다른 기저가 필요했다. 더욱더 아득히 깊고, 심오한 무엇인가가. 그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신앙은 삶의 원동력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반드시 뭔가를 믿는다. 뭔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인간은 무언가를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진격의 거인>에서의 아르민의 대사처럼, 인간은 저마다 어떠한 믿음(이상, 꿈 등)에 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너무나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계의 파도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도의 방향에 대항하기 위한, 저마다의 방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다만, 톨스토이의 신앙은 우리가 통용적으로 사용하는 신앙심의 마음과는 다르다. 톨스토이는 신을 섬기는 것보다, 모든 이들을 사랑하려는 태도를 더욱 중요시 여긴다. 그에게는 축일이나, 찬송가 가사의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에 저질렀던 자신의 욕망과 악행에 대해 참회하고,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 그들의 삶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 오래도록 쌓여온 톨스토이 자신의 오만한 권위를 무너뜨리는 작업만이 필요했다. 어쩌면 가장 종교의 본질에 부합하는 행동이지만, 종교인들에게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행위를 톨스토이는 직접 실천했다. 이것이 그가 당시 교회를 비판했던 이유임과 동시에, 니체의 비판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세계가 악하고, 무의미하더라도, 우리는 현존하고 있기에, 그것에 맞설 수 있다. 즉, 우리는 악과 허무에 대해, 선과 의미에 대한 의지로써 반항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반항은 우리 모두를 향한다. 바로 이 순간의 '정오'의 순간이다. 톨스토이의 의지가 가장 높이 생생하게 떠있는 순간, 그 순간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뜨거운 태양 아래, 우리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있다. 당신은 권총을 어디를 향해 쏠 것인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딛고 있는 땅의 이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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