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고
서론, 살아가는 이유와 두려움
“인간은 살아있는 한 반드시 뭔가를 믿는다. 뭔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말년의 저서에서 이와 같이 말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믿음”에서 나옴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간 인류는 무엇을 믿어 왔는가? 고대그리스부터, 르네상스, 그리고 중세까지도 인간은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니체의 등장 이후, 인간을 가두던 울타리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드넓은 황야일 뿐이었다. 그곳에서 인간은 불안과 공포를 느꼈으며, “힘”을 통한 지배와 복종으로서 두려움을 회피했다. 그 결과, 히틀러와 나치즘(민족주의)이라는 극단적인 파시즘이 세계를 휩쓸었다. 결과적으로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히틀러와 나치즘(민족주의)이라는 악령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인간은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던졌으며,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라는 길 위를 굴러가는 인간이라는 바퀴의 축에 이것저것(자유, 인권, 평등, …) 이름을 붙이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솔제니친의 이번 소설은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인간이 계속해서 살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 사이를 줄타기하면서도, 자신의 의미를 찾아 나섰다. 그는 삶을 지탱하기 위한 기저로서 의미를 향한 의지를 역설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은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역사적인 맥락과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무의미함과 허무감을 느낀다. 약 3000년 정도의 인류 문명의 역사 동안, 인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쟁과 학살은 멈추지 않으며, 인간 현존이 존중받지 못하는 세계에서 계속 침몰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는 죽는 순간까지도 타인과 세계의 심연을 헤엄칠 수 없는 존재이다. 그저 그들을 포장한 가면을 바라보며, 끝없이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이방인일 뿐이다. 솔제니친의 소설 배경이 된, 당시 러시아의 사회는 이러한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한다. 기존 사회 질서의 붕괴에 대한, 새로운 이상적 사회의 수립을 외침과 동시에, 신뢰할 수 없는 타인과 세계에 대한 연속적인 감시와 통제. 이것이 소련의 정책이었다. 즉, 하나의 이상향을 설정하여 삶을 지탱하도록, 두려움의 감정을 자극하여 개인이 집단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대한 배를 구축했다.
소련 사회의 실패와 삶의 무의미
이 소설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슈호프의 ‘반’에 대한 태도이다. 소련의 사회주의는 그저 형식적인 사회주의일 뿐, 그 실상은 독재적 파시즘이었다. 이를 지탱하기 위해, 앞서 말했듯 감시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기저로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슈호프의 모습에서 보다 사회주의의 근원적 지향에 가까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흙삽을 다른 반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겨두던 슈호프가 남은 모르타르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이 일을 자처하고, 흙삽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대목(p.143)은 그저 단순히 지나칠 대목이 아니다. 그 찰나의 순간동안 슈호프는 자신과 반원을 구분 짓지 않고, 그 둘을 위해 행동하는 ‘정오적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슈호프와 같은 사람이 10년형을 선고받고 있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자신과 집단을 위하는 사람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사회주의자였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시 소련의 지배층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사회주의 체제를 수단화했음이 폭로된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부유하고 많이 배운 우리 계층 사람들의 생활이 역겨워졌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활은 나에게서 모든 의미를 잃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 모든 논증, 모든 학문, 모든 예술이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였다. 이런 것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노동을 하며 스스로 삶을 창조하는 민중의 행위야말로 참된 것이었다.”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정답은 체제가 아닌 민중의 삶 속에 있었다. 그들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쫓지 않는다. 그저 빵 한 조각에 감사해할 뿐이며, 아침에 30분 더 누워있는 것에 행복해할 뿐이다.
조금 더 나아가면, 현대인의 삶은 수용소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이유도 모른 채로 그저 공부를 끊임없이 해서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이 작용한다. 성적은 일종의 노력에 대한 성과로서 작용하여 학벌이라는 계급을 형성한다. 그리고, 또다시 취업의 문 앞에서 경쟁해야 하며, 승진에서 경쟁하고, 거주지역과 가정, 그리고 노후를 위해 계속해서 무의미하게 경쟁할 뿐이다. 우리는 그저 현재 주어진 상황에 대해 만족하기보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노동할 뿐이다. 그러나, 그 기준을 모두 충족하더라도 주어지는 대가는 없다. 남는 것은 오직 “이걸 위해서?”라는 공허감뿐이다. 우리의 눈이 내일과 하늘을 향할수록, 우리의 순간은 빛을 바래간다. 하지만 슈호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3613일 동안이나 매일 같은 삶을 반복했으며, 자신의 유일한 꿈이었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삶을 지탱해 나간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볼 수 있듯, 그에게는 거창한 이상이 아닌, 순간순간의 감사함과 행복이 있을 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종교의 등장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진정한 신앙적 태도는 신에게 기도하며, 내일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의 성취에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일종의 세레머니) 그렇지만, 알료쉬카의 말처럼 영혼의 원죄에 대한 구원을 바라는 것도 그리 진정한 신앙적 태도는 아닐 것이다.(p.222)
모든 흐름을 하나로 아울러주는 태도는 바로, 파도 앞에서 모래성을 쌓는 태도(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라 할 수 있겠다. 슈호프도 현생을 살아가는 우리도 너무 급격한 이상향을 꿈꾸는 순간, 그것은 정오를 넘어서 변질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세계의 부조리를 인식했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수용소라는 감옥에서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기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우리는 부조리에 직면해서 반항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의 심연을 알 수 없음을, 우리의 지하세계가 타인에게도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경멸하거나, 혐오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심연을 헤엄쳐보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사랑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또한 설령 그 반항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할지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믿는 동시에, 스스로를 맹신해서는 안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계속해서 걸어가야 한다. 우리가 정오에서 멀어져 부조리의 파도에 삼켜져 버려 어둠이 들이닥쳤을 때, 우리는 허무의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그렇기에 걸어가는 것, 즉 살아가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살아가기에 슈호프처럼 부조리하고, 허무한 세상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며, 때론 감사함을, 때론 사랑을, 때론 기쁨을, 때론 좌절과 절망,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정오의 태양 아래서 살아간다면, 사르트르의 유명한 문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 순간 존재의 의미는 그림자처럼 따라와 붙는다. 그렇기에 삶의 무의미를 두려워할 필요 없다. 정말로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태도
역시나 이번에도 나의 나침반은 싯다르타를 향한다. 우리는 어부의 삶에서도, 거지의 삶에서도 신을 느낄 수 있다. 신은 권위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을 믿기만 하는 자는 결코, 신앙인이 아니다. 실천하는 자, 그가 진정한 신앙인이다. 니체도, 톨스토이도, 솔제니친도 모두 이 점에 주목한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 오늘날 자본주의가 무너져가고 있는 이유는 동일하다.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권위로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념이 아닌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도구를 숭배하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본질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반항이 이어짐을. 우리가 지나가야 할 길은 개인의 실존과 세계에 대한 사랑 아래서의 저마다의 반항임을 깨우치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하늘이 아닌,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행복을 찾아 헤매는 한
그대는 행복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행복>의 구절, 헤르만 헤세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와닿는 의미는 역시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저 문득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불합리한 이유로 강제로 수감된 10년 이상의 끝이 없을 수감 생활. 아주 작은 먹을 것과 고된 노동이 반복되는 수용소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책이 여운이 남고, 오래도록 기억 남는 이유는 우리가 고된 현실 속, 사소함에도 행복을 느끼는 슈호프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애정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저마다의 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늘 화려함에만 머물러 있다. 그렇기에 불안해하고, 시기하고, 질투한다. 하지만 슈호프는 그저 담담히 살아간다. 무려 8년 넘게!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삶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