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크눌프를 읽고
크눌프는 헤세의 초기작품이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부터 유리알 유희까지 이어지는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헤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헤세의 화신임을 기억하자. 니체가 자신의 화신인 차라투스트라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처럼, 헤세는 한스, 크눌프, 싱클레어와 데미안, 싯다르타, 하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리고 크네히트까지의 화신들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을 길에 이정표를 세우고, 이를 넘어가는 구도의 길을 반복한다. 즉, 우리는 크눌프를 통해 헤세가 남긴 발자취의 초입에서 그의 고민을 함께 나누어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하여
어렸을 적 자살시도를 시작으로 헤세는 평생을 자살충동 속에서 살아간다. 동시에 그에게 죽음이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유리알 유희>에서 마침내 승화해내기까지 매 작품 계속해서 투쟁해왔다. 이런 점에서 크눌프의 ‘죽음’은 상당히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죽음으로 인해 삶의 모든 순간이 ‘무’로 돌아갈 것이라 여김에서 기인한다. 삶의 모든 시도가 허무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죽음은 카뮈의 말처럼 인간의 삶에서 가장 큰 ‘부조리’로 작용한다.
크눌프는 하나의 일상에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은 프란치스카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나서부터 비롯된다. 이 경험을 통해 크눌프는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 종말을 맞이하기에, 영원히 아름다운 것은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기에 그는 수준급이었던 자신의 재능과 안정적인 삶을 버리고, 시들어버릴 것에 종속되기보단,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서는 방랑인의 삶을 택한다. 하지만 그 역시, 세상의 일원으로서 결코 늙음과 병,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삶의 마지막에서 프란치스카를 보고 싶어하던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그의 방황은 그가 원했던 삶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남긴다.(사실 앞에서도 이런 암시가 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라는 소식을 들은 그는 실망감과 함께 다시 고향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는 그에게 삶의 전반에 걸쳐 그 어느 때에도 의지할 곳 없이,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운명이 주어졌음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그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연속적인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쓸쓸한 삶을 살아왔다. 그가 하느님에게 말했듯, 그는 최고의 행복을 느끼던 그 순간에 역설적으로 죽음을 바라왔다. 그는 시들어 죽는 종말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는 동시에 그가 자신의 삶 전체를 긍정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는 삶 전반에 걸쳐 봄날의 아름다움과 상실감 사이에서 아름다움만을 쫒으며, 상실감을 피하고자 했다. 물론 그의 시에서 결국 돌아올 것이라는 암시를 남기지만, 이건 오히려 강인한 의지보다는 그리움과 씁쓸한 미련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신과의 대화의 끝에서 마침내 자신의 삶 전체를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음성은 어머니처럼, 옛 두 연인처럼 변하며 들리게 된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에서 신이 함께 했음을 의미함(톨스토이 복선 회수)과 동시에, 그의 모든 경험을 절대적으로 관통하는 삶에 대한 긍정(깨달음, 훗날 유리알 유희)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의 방랑은 끝이 났다. 아름다움만을 긍정하던 크눌프가 마침내 자신의 방황 그 자체를 긍정하게 되면서(아름다움과 상실을 모두 긍정, 헤세의 변증합), 자신이 누운 자리에 대한 평온함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에 대하여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한 헤세의 말을 통해 역시나 서양중심의 구도적 의지가 담겨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이는 만인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를 바탕으로 결말을 해석한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즉 자신과 마주친 모든 사람들과 세계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간 그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해서였기 때문이다.(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가 다시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는 이유) 그는 자신의 죽음의 문턱 앞에서까지 프란치스카 단 한 명을 사랑했다.(2장의 꿈에서도 잘 나와있음.) 하지만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경험을 사랑하게 된 그가, 신의 음성에서 어머니와 옛 연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린 아이같으면서도, 어른스러워 보이는 데미안의 인자한 모습, 싯다르타가 짓는 만인의 삶이 담긴 부처의 미소, 크네히트가 보여주는 명랑함까지. 이 모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즉, 신의 본질은 바로 사랑의 감정이다. 헤세에게 이러한 사랑은 심연에 대한 다리이자, 양 극단에 위치한 자아와 세계의 조화를 위한 동력이 되어준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그 삶의 유한성마저 긍정하고, 죽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암시되진 않았으나, 시들을 통해 알 수 있듯, 반복되는 방랑(삶)을 긍정하고, 마침내 방랑을 종결하는 모습으로서 그의 후기 작품에서 등장하는 영원회귀 모티브를 살펴볼 수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세계를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훗날 <데미안>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헤세 사상의 핵심이 자아와 세계의 간극에 대한 변증합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세계는 곧 나이며, 나는 곧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의 간극을 사랑의 감정으로서 조화, 변증합 해내어 모든 모순을 넘어서는 것이 헤세의 길이다.
마무리하며
<죽음의 수용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이어 이번 책까지, 계속해서 삶을 긍정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다룬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든, 어떠한 의미가 있든, 삶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은 한 편의 작품인 셈이다. 이는 역시나 타인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타인의 간극에 대해 우리는 <어린왕자>에서 배웠다. 보이지 않는 심연은 사랑의 힘으로서 잠시나마 유영해볼 수 있다고.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이 얽혀 참 좋은 세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계는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이런 사람마저 사랑할 수 있을까 싶은 아주 혐오스럽고, 끔찍한 부류들도 존재한다. 그들과 그들을 무사유로서 추종하는 이들로 인해,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도태되거나, 무시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던 세계는 현실이 아닌 이상 속에 남게 된다. 즉, 구도자의 죽음은 반복된다. 우리가 여전히 디즈니를 보면서도 너무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미 우리의 사회는 너무 먼 길로 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헤세는 크눌프와 같은 이들이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세계에 책임이 있다는 강경한 행보를 취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세계에게 선고를 내려야 하는가. 하지만 타인에게 선을 강요하고, 완전함을 강요할수록 사회는 본질을 숨기기 시작하다. 위선적이고 허울뿐인 세계가 만들어진다. 헤세는 강요하지 않는다. 행동으로서 다른 이들의 마음과 태도를 변화시킨다.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에, 깊은 사랑이 없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된다. 부조리를 인식한 우리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모순에 대해 어떤 길로 투쟁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