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를 넘어
오래간만에 핸드폰의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구절이 며칠 동안이나 밤잠을 설칠만큼 너무나 큰 감동을 주었다. 사실 그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다시 읽을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것이 나의 자만임을 깊게 반성했다. 내 마음속의 고요함을 흔들어버렸던 파동은 바로 서문에 담긴 글이었다. 오늘은 이 글을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과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한 번 같이 읽고 시작해보자.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내가 여러 차례 글에서 다뤘을 정도로 나에겐 생동감이 넘치는 단어다. 하지만 나는 한때의 이명준(최인훈, <광장>)처럼 밀실 속에서 이를 다룰 뿐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광장의 존재를 알려준 책은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카는 이 책에서 역사가에 대해 역사라는 바닷속에서 손으로 바닷물을 담아 비춰보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사실을 알 수 없으며,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사실 역시 당대의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는 진정한 역사가란 자신의 해석과 기록된 사실 사이에서 첨예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카뮈가 허무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정오를 놓치지 말라고 말한 것과 맥락이 완벽히 동일하다. 이러한 귀결을 다시 사르트르의 문장에 대입해 보면,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해석하는 존재가 된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이어져, 하나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영화, 소설, 드라마 등과 같다. 해당 매체에서도 주인공의 모든 삶과 생각과, 온전한 하루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제에 맞게 선택된 그의 장면들이 이어붙어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삶의 부분부분이 모인 집합을 긍정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으로 강한 위버멘시라면, 혹은 크네히트나 차라투스트라를 넘어선 존재라면 삶의 전체를 긍정할 것이다. 그에겐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적이면서도 전체적인 이유가 따라붙는다. 그에게 주어지는 순간순간의 일은 결코 진부한 것도, 스쳐갈 한낯 우연도 아니다. 그의 매 순간은 그의 이야기에서 필연적 요소가 된다. 즉, 우리가 우연이라 여기거나, 삶에서 동떨어진 파편으로 여기는 기억마저 필연이자 운명으로서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질 그 어떠한 일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야기의 완결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야기의 진행을 행복하게 즐길 뿐이다. "시시프스는 행복하다."라며 카뮈가 말한 것처럼. 그렇다. 이게 곧 니체의 아모르파티이다. 다가올 운명에 대해 "그것이 삶인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 외칠 수 있는 힘이다. 이야기를 긍정한다는 말에 대해 이해가 어렵다면 <수용소의 하루>에서 데니소비치의 삶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그는 니체처럼 불타오르는 정열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주어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살아가는 자이다. 혹은 유명한 웹소설 <전지적독자시점>과 같은 작품에서도, 이야기로서의 삶을 긍정하는 과정이 주요 주제로서 등장한다. 혹은 게임에 몰입한 순간과 같다. 하나의 스토리가 끝나거나, 하나의 판이 끝나는 것을 바라기 보다, 그 순간의 수많은 변수와 자신의 상호작용을 즐기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밀실과 광장 사이에 길을 놓아보자. 하이데거, 레비나스가 지적했듯, 실존주의는 개인적인 길로 빠지기 쉽다. 우리는 타자를 인식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의 삶을 사랑하게 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가슴속의 끓어오름도 없이 교리를 따르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신을 해석하듯, 끊임없이 세상을 해석하는 태도를 지녀야 함을 말한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타인을, 세계를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오만에 빠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 우리는 산 정상에 돌을 올려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의 손으로 담지 못한 아주 소량의 물방울 하나만으로도, 돌은 저 아래로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도하는 존재로서, 시도를 포기해선 안되는 것이다. 손으로 담으려 하기보단, 싯다르타가 그랬듯 심연이라는 바다에 기꺼이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흘러가보며 세상을 느껴봐야 한다. 바닷가에서 손으로 떠본 바닷물과 실제 바다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세상에도, 자신처럼 딸기가 자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80억 인구가 있다면 80억 종류의 열매가 맺는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되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보면, 이는 오늘날 인권운동의 한 축인 환경운동과도 연관된다. 지난 역사에서 인간은 인간에게만 이성이 있다고 믿어왔으며, 유일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돌고래 집단마다의 사투리가 확인되었으며, 인공지능을 통해 그들의 대화가 문법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작은 동물도 감정을 느끼며, 주체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즉, 이제는 인간 중심의 길을 걸어온 돌이 저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우리는 세계에 대해 오만했으며, 인간외에 대해 무관심했다. 사실 인간은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믿었던 혁명들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처참히 실패했던 것 아닌가? 환경정의와 관련하여 실존주의가 확장되어 온 배경은 독일의 68 혁명을 기점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내용이 방대하므로 궁금하다면 직접 찬찬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난 역사를 거쳐오며 그 어떤 진리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진리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존재여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진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신을 믿는 자는 자신의 삶의 길을 신앙으로서 해석할 뿐이며, 음악가는 자신의 삶을 몇마디로서 설명할 뿐이다.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시도하는 존재니까. 그리고 정당한 해석을 위해서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바다가 전부가 아님을 잊지 말고, 그 바다를 이해하고, 경험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즉, 진정한 사랑으로서 그들과 잠시나마 동화되는 순간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의 다리를 통해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무한한 감정을 느끼는 정오의 순간이며, 삼백예순날 기다려온 모란이 피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이 다시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것에 좌절할 필요도, 돌이 정상에 올랐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시를 읽어보자.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더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파라켈수스-
지금 그대의 가슴 속에는 충만함이 끓어오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