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예술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허들이 높은 건 '미술'이 아닐까 싶다.
반대로 허들이 가장 낮은 예술의 형태는 음악이라 생각한다. 가장 대중적이면서 원초적이다. 음악감상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전제조건이 없다. 귀를 갖고 태어났다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매우 직감적인 예술이다. 음악에 대한 사전 지식도 필요 없다. 2-3살의 어린아이가 스피커로 나오는 음악의 흥에 취해 점핑을 하거나 엉덩이를 좌우 흔드는 것처럼.
하지만 미술은 다르다.
미술이라는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전제조건 즉 어떠한 그림을 보고 느끼고 생각을 하려면 예행이 필요하다. 물론 타고나기를 감각적이거나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아이디어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미술감상 연습" 없이도 로스코 Rothko의 작품을 보고 그 색감과 모양과 조합에 압도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히 드물거나 혹은 이미 태어난 가정환경으로 - 예를 들어 부모나 가까운 친지들이 예술계에 있어 어릴 때부터 미술이나 그림에 노출수가 높을 경우 - 빚어졌을 경우가 높다.
미술을 감상하기 위해선 우선 어느 정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가만히 미술작품을 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술이나 그 그림에 대한 작은 지식 혹은 예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저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기 위해선 시간과 돈을 써야 한다. 전시회나 미술관에는 입장료가 존재하며 집에서 미술관까지 가는 데에도 이동시간, 교통수단 및 나의 신체적인 수고스러움이 조건으로 붙는다.
물론 집에서 두 다리 뻗고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구글이나 네이버에 검색해서 그림을 볼 수 있겠으나,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2D의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는 매우 어렵다. 실제로 보았을 때 보이는 입체적인 작가의 brush stroke와 미묘한 음영과 색조합 등이 어우러져 작가가 불어놓은 영혼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이게 가장 중요한데, 바로 미술관의 분위기 즉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웅장함과 위대함은 그림에 엄청난 버프를 준다. 마치 내가 아무리 유튜브로 페기 구의 라이브 세트를 듣고 심취하더라도 맨 앞줄에 서서 그녀의 라이브 세트를 직접 보고 경험했던 2018년 그 가을밤의 임팩트에 발뒤꿈치도 따라오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단순 그녀의 믹싱 스킬과 탁월한 디제이 역량을 넘어 붉은 오렌지 빛의 조명아래 처음 만난 낯선 이들과 한마음으로 그녀를 응원하고, 다 함께 같은 음악을 느끼고 감동을 받은 그 순간들이 음악이라는 듣는 행위의 예술을 더 입체적이고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부끄럽지만 어릴 때는 어느 정도의 허세가 내가 미술관을 찾던 주된 목적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미술작품들이 주는 영감과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잔잔함과 평온함으로 미술관을 찾아간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좀 더 성숙해졌기에 작품을 향한 나의 진정성 있는 태도가 한몫을 한 것 같다.
재밌는 건 시간이 많고 자유로웠던 20대 초반 대학교시절과 대학교 졸업 이후 갖었던 1년 동안의 갭이어 (Gap Year) 때는 미술관을 거의 가지 않았다. 오히려 치대를 시작하고 나서 공부와 환자진료에 치여 미친 듯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낼 때 본격적으로 미술관을 찾기 시작했다. 미술작품이 주는 시각적 자극은 깊은 영감을 주었고 나에게 생기를 불어주었다. 일상에 지친 나에게 미술관은 현실 도피 및 안식처였을지도 모른다.
그때로부터 나는 더 성장했고 오늘의 나는 그때의 나의 업그레이드된 또 다른 새로운 사람인 것처럼, 미술관을 가는 걸 좋아하는 새로운 이유가 생겼는데, 그건 바로 그 공간에 주는 힘과 그 공간을 찾는 사람들의 매력 때문이다.
미술관에 가면 마음의 안정이 찾아드는 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니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한 대칭과 구도 때문인 것 같다. 예술작품들이 공존하다 보니, 크게는 건물자체의 아름다운 구조부터 작게는 예술작품의 프레임과 조명까지 꽤나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고 설치되어 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마저 예술적이고 멋있다 (리움 미술관과 엘에이의 LACMA와 휘트니미술관).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웅장함과 고귀함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평소에 목소리가 크고 거친 사람도 미술관에 오면 언제 그랬냐듯이 마치 점잖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안 시대의 신사가 된다. 공간이 주는 위엄성에 순응한 것처럼 사람들은 천천히 걷고, 조근 하게 말하며 암묵적으로 약속한 에티켓을 지킨다.
20대 때는 작품에 집중하고 싶어서 미술관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갖었는데 30대가 된 나는 이제 반대로 미술관에 오는 사람들이 참 다양하고 재밌어서 더 흥미로운 사람들이 미술관에 찾아오길 바란다.
어릴 적에는 작품을 찍고 미술관의 외부 및 내부의 건축물에 집중했다면, 어느덧 나는 미술관에 온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사람들. 어린 초등학생부터 지팡이를 짚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한 색상의 인종들. 무수한 패션 스타일.
사실 나는 사람이 많이 몰린 곳을 싫어하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러야 하는 단체생활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은 모이면 모일수록 불필요하고 골치 아픈 문제들만 더 생긴다는 좀 삐뚤어진(?)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참 아이러니하게도 대학교와 치대 시절 두 번이나 학생회 회장을 맡았고 축구부 부장도 했었다...)
이상하고 신기하게도 미술관에 온 사람들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이상한 정이 생기고 친밀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작품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고뇌하고 작품에 매료되는 걸 관찰하는 게 매우 흥미롭다.
시간에 제한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다인원수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행위는 미술뿐이지 않을까?
음악, 영화, 공연예술 performing arts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은 시간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 즉 관객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예술의 타임라인을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미술감상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하나의 작품을 보지만, 자유롭게 자기의 페이스에 맞춰서 감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며 집중하는 그 고요함을 나는 좋아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같이 온 일행에게 자기가 느낀 점, 혹은 아티스트나 작품에 대한 정보를 낮은 목소리로 공유하지만, 대부분은 우선 조용히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집중함에서 오는 그 고요함. 도서관에서 존재하는 그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살기 있는 집중함에서 오는 고요함과는 다르다. 이건 순수히 즐기기 위한 마음속 여유와 창작자를 향한 존경하는 애정심에서 나오는 고요함이다.
가지각색의 낯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벽에 걸린 그림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각자 자기 갈길을 간다. 대부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어떻게 보면 참 웃기기도 하다. 인간이란 참 이상하면서도 귀여운 동물이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예술을 사랑하고 그림을 보고 미술관을 즐기기 위해 왔다는 그 전제가 매우 크다.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그 마음이 미술관에 온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태도와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나의 인류애는 상승한다. 이 세상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이상, 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각박한 세상 속에도 따듯함은 존재할 거라고.
어쩌면 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그 따듯한 온기가 인류를 향한 나의 회의감이 사그라지게 도와주는 수호천사의 역할을 하는 거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은 그들을 향한 일종의 러브레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