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에서 창업가로
0.
무더운 여름의 한 일요일. 문득 <진격의 거인>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항상 지인들이 추천해 주던 작품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대 이상이었다. 마지막 편을 끝낸 지 이제 일주일정도 되었는데 아직도 긴 여운이 가시질 않는 다. 무엇보다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기에 더더욱 훌륭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진격의 거인>의 주제의식 중 하나는 "실존주의 existentialism"이다.
치과의사에서 창업가의 길을 고민했을 무렵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 깊게 생각했었는 데, <진격의 거인>을 보고나니 실존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과 창업가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1.
실존주의 철학가 사르트르 Sartre의 유명한 말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istence preceeds essence
물건과 달리 인간은 실존하기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펜"은 필기도구이다. 필기가 불가능한 펜은 더 이상 펜이 아니다. 물건의 본질이 물건의 목적을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애초부터 인간은 "펜", "의자"처럼 어떠한 용도를 갖고 태어난 게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니까.
태어났기에 살아야 한다. 본질 혹은 사명감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렇기에 우린 자유롭기도 하다. 우리는 '무언가를'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니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지, 어떠한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2.
하지만 우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근시적으로는 부모나 가족이 바라는 삶의 방식이 우리의 인생을 다져놓기도 한다.
집안에 사업을 망한 친척이 있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안정적인 직업,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전문직을 하라고 권유 혹은 강요할 확률이 높다. 교육자 혹은 의사 집안이라면 자식도 교육자나 의사 관련 일을 하길 바라고, 종교적인 집안에 태어났다면 같은 종교를 섬길 "숙명"을 갖게 되기도 한다.
거시적인 시각으로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역할에 맞춰 살아야 하기에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단순한 예로는 학생의 임무는 공부이기에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다른 "여가활동"으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혼나고 벌을 받는 다. 공부보다 예체능에 관심이 많은 아이라면 억압받고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인 남성이라면 "남성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눈물이 없어야 하고, 강인함을 항상 장착해야 하고, 약해 보이지 않고 감정적이기보단 이성적이어야 하며 결혼하기 위해선 혹은 결혼 후 가장으로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가 존재한다.
불과 100년 전, 1900년도 초중반에 한국에 사는 여성들이 공부하러 대학을 간다는 건 매우 낯선 일이었다. 친할머니는 다섯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는 데, 할머니와 또 다른 여자 형제는 몹시 높은 학구열을 갖고 있었지만 "여자"이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빨리 결혼을 해 독립을 하는 게 "효도“다라는 사회가 만든 틀에 순응하셨다. 반대로 할머니의 남자 형제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서서히 바뀌고 있지만, 동성결혼이 불법이고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한국의 사회적 인식 때문에 본인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고 사랑을 포기하며 과거에 살아갔었고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3.
사회에서 기대하는 행동들과 생각들(social expectations)에 나를 맡기는 게 사실은 인생을 "쉽게" 사는 방법일 수도 있다. 순응적으로 짜인 역할에 맞춰서 행동하고 생각하면 되니까.
무엇을 요리할지 알고, 요리에 필요한 재료와 레시피가 있으면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재료를 어렵게 구하고 열심히 요리를 만드는 사람은 나이지만, 그 요리와 요리에 필요한 음식 재료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제안(suggestion)"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사회적 규범(social norm)에 맞춰서 "보편적으로" 살면 큰 하자를 겪을 일도 적을 테다. 부모, 가족들, 배우자, 가까운 지인들의 마음에 쏙 들 테고, 내가 사는 사회 속 타인의 눈에도 딱히 모난 게 없어 보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일까?
역설적이게도 이런 틀, 체계, 심하게는 속박이 없으면 오히려 인간은 불안함을 느낀다. 온전한 자유는 곧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온전한 자유로 인해 우리는 더 혼란스럽고, 우울해지고, 이 세상에서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라는 고뇌에 빠진다.
백지상태에서 무슨 요리를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어떠한 재료가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아니 요리를 만들긴 해야 하는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우왕좌왕하는 느낌이랄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유를 외치면서도 동시에 부모 혹은 사회가 주는 역할을 실행하고 그런 사회의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5.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미 체계와 틀이 만들어진 이 세상,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물론 우리는 이 사회를, 이 세계를 바꿀 수는 없다. 인류가 몇천 년을 걸쳐서 만든 종교라든지, 자본주의와 여러 사상들, 사회적 규율을 내가 바꿀 수는 없겠으나,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자 나의 자유이다.
나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 미국에서 살지만, 돈과 물질적인 부가 성공이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다.
나는 교정의사라는 전문직을 갖고 있지만, 전공에 맞춰 직업을 선택하거나 혹은 현재 나의 직업에만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다. 나의 직업은 치과의사이기에 이 사회에서 나의 역할은 치과의사뿐이라며 나 자신을 고정된 독립체 (fixed entity)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
6.
결국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either 주어진 틀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가능한 선택들만 하며 안주할 것인가 or 그 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개척해서 살아갈 것 인가?
정해진 답도 없고, 옳고 그른 답도 없다. 그리고 그 답은 개개인마다 다를 테다. 누군가에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행복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그게 불행이자 지옥일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선택을 내리면 된다. 대신 그 선택에서 오는 대가와 책임을 내가 지면 되는 것뿐이다.
선택을 내린 후에는 그저 그 길을 묵묵히 가면 된다.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타인들의 선택을 보며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내가 내린 선택이며 스스로 맞다고 믿고 쭉 가면 된다.
"Comparison is a thief of joy 비교는 인생의 기쁨을 훔쳐가는 도둑"이라고 미국 전 대통령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가 말했듯이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건 애당초 행복에서 더 멀어지는 바보 같은 행위이다.
주체적인 삶을 갖으려는 이유는 가장 "나"답게 (authenticity) 살고 싶어서 이지 않을 까. 그리고 "나"답게 살고 싶은 이유는 삶의 만족도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닐 까?
그리고 그렇게 내가 내린 선택이 결국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즉 나의 선택들이 모여서 나의 essence 본질이 된다.
7.
십여 년 전 20살의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결국 인간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뿐. 은하수 시점에서 바라보는 나의 인생은 단 1초도 되지 않겠지. I think life is a big joke to God."
나는 매우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었다. 나는 삶의 의미가 없다 생각했고 의욕도 없었다.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대학교 동기들을 보면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여전히 인간은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 생각한다. 나의 일생은 이 거대한 호모 사피언스 인류역사에 쩜 "." 조차 되지 않을 테다. 하지만 그렇기에 why not?이라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어차피 우주의 먼지밖에 안 되는 삶인데 주체적이고 내가 진정 원하는 삶(자유)을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이 우주의 먼지 같은 인생, 내가 죽을 때 후회 없는 멋지고 재밌는 삶이었다고 나 스스로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영화 <버드맨 Birdman>에서 엠마 스톤은 두루마리 휴지에 짝대기를 빽빽이 그려놓는다. 두루마리 휴지는 지구의 나이 60억 년 (6 billion years)을 의미하고 (사실 지구는 45억 년, 4.5 billion years이다), 이 짝대기 하나는 천년(1000 years)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녀는 두루마리 휴지 한 쪼가리를 뜯어서 마이클 키튼에게 건네며 얘기한다:
"그리고 이 휴지 쪼가리 한 장이 인류가 지구에 존재한 시간이야"
https://www.youtube.com/watch?v=sy4Y6H1ucew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23년 9월 1일, 나는 다짐했다. 창업을 하기로.
뜨거운 여름을 달래주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시작하는 그날. 교정의사라는 커리어, 직업군으로 나 자신에게 한계를 주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개척하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고.
후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지금부터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나의 인생 스토리는 무엇이 될지 써내려 갈 거다. 더 이상의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다.
p.s.
아직 실질적인걸 이룬 것도 없고 심지어 창업초기 단계라 이 브런치 북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연재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나의 이 여정이 어떻게 끝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기에. 이 길의 끝에 처참한 실패가 혹은 pot of gold(금이 가득 든 항아리)가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에 실패든 금이든 상관없다. 그저 먼 훗날 죽는 날이 다가와 내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꽤 멋진 도전을 한 재미있었던 삶이었다고 미소를 지으며 죽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 브런치 북은 기록을 남기고 싶어 시작한다, 비슷한 고민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