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함 보단 유일함. Uniqueness over Competence
1.
정보화 시대(information age)에서 AI시대의 시발점을 지나고 있는 오늘날에는 문학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것 같다. 모두가 문학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재 문학을 가장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이공계학생 및 이공계 관련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1990년도 인터넷 혁명으로 누구나 쉽게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2000년도 스마트폰 혁명으로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할 때 즉시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2025년에는 AI 혁명으로, 기존에는 개개인 혼자서 하기 힘들었던 일을 보다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포토샵, 일러스트를 쓸 줄 모르더라도 AI에게 원하는 그림을 프롬트로 쓰면 내가 상상한 그림이 몇 초 만에 내 눈앞에 그려져 있다. 영상을 전문가만큼 못 만들어도 AI를 사용해서 원하는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을 만들어서 유튜브에 채널을 운영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주 좋은 예시가 바로 김햄찌 유투버).
혹은 나 자신이나 자녀 혹은 반려동물이 아픈 증상을 보이면 전문가의 소견을 받으러 병원에 직접 방문하거나 인터넷으로 몇 분씩 검색하고 찾아볼필요없이 바로 AI가 5초 이내로 감별진단(differential diagnosis)을 해준다.
즉 다른 전문성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예전에 비해 덜 필요로 해졌다. 물론 AI는 여전히 hallucination현상이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시간(검색해서 원하는 정보를 찾기까지 걸리는 시간/에너지)을 아끼게 해 주고, 개개인의 능력치를 증폭시켜 준다.
<듀얼 브레인, Co-Intelligence>에서 저자 이선 몰릭 (Ethan Mollick)는 이렇게 말했다.
"AI will level out the playing field"
"AI가 경쟁 환경을 평준화시킬 것이다"
그는 무능력한 사람들도 평균이상의 능력자들이 될 거라고 예상한다.
즉 능력/효율성 민주화의 세상이 곧 다가올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곧 다가온다는 말은 틀렸다. 이미 그러한 세상의 문은 열렸다.
이젠 유능함보단 유일함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2-1.
유능함과 유일함이란 단어들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에 나의 매우 개인적인 생각을 토대로 이 글의 취지에 맞게 정의를 해보려고 한다.
유능함은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정확하게 알고 때에 맞게 그 정보와 지식을 써서 업무의 효율성과 성공을 높이는 (2차원적인) 능력이라면 유일함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사고로 새로운 방식이나 솔루션을 창조하는 (3차원적인) 능력이다.
유일함의 좋은 예시가 바로 융합(synthesis)이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개의 다른 학문/사고를 융합하여 새로운 체계나 통찰을 만드는 행위.
많은 빅 테크 회사들이 이러한 능력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는 둔탁한 회색 정사각형에 소위 감성 따윈 개나 줘버린 폰트로 만들어졌는데,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도, 전자기기도 미적으로 아름답고 세련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최초로 테크와 예술의 교집합인 회사 애플이 탄생했다.
1980년도 클럽에서 공연하는 래퍼들은 R&B 트랙 위에 랩핑을 했었다. 힙합이라는 거칠고 날것의 음악이 라이브로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근데 그때 대학생 한 명이 기가 막힌 제안을 한다. R&B트랙이 아닌 드럼 비트, 거친 기타나 베이스연주, 그리고 턴테이블의 스크래치 위에 랩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소수만 듣고 찾는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었던 랩 음악이 보다 대중적인 클럽에서도 성공적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심플하지만 강렬한 타악기 위에 거칠고 날것의 랩핑과 턴테이블 스크래치. 음악 프로듀서의 거장인 릭 루빈 (Rick Rubin)은 본인이 좋아하는 펑크록 음악과 랩을 절묘하게 융합하여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힙합신을 이끄는 선두자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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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으로 우리 사회에선 유능함을 높게 평가하고 더 높은 보상을 받는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있다. 유능함을 평가하는 잣대중 하나는 학벌과 시험점수다. 여전히 우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선 수능 시험 (미국에선 SAT)라는 표준화된 시험 (standaridized test)에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말이다. 치대, 의대, 법대도 마찬가지이다. 표준화된 시험은 가장 많이 그리고 정확한 정보와 팩트를 외운 사람에게 유리하다.
유능함이 인정받는 프레임에 길들여진 우리는 더 유능 해지기 위해 애쓴다. 더 스펙을 쌓고, 더 많은 학위를 따고, 더 높은 타이틀을 얻기 위해 꽤나 치열하게 살아간다. 유능함을 내세우는 대결은 사이즈가 제한된 파이를 쟁취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누군가가 나보다 더 유능할 경우 나는 대체될 수 있다. 우린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나의 능력치 (유능함)을 타인과 비교하고 경쟁한다. 내가 당신보다 더 유능해져야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속에서 끝나지 않는 스파링을 뛰고 있다.
물론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진 않을 테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욕심 및 야망이 있거나 혹은 자기의 일/커리어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생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자랐고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AI는 인간보다 매우 압도적으로 그리고 월등하게 유능하다. 제로섬으로 (제한된 파이를 경쟁하는 시스템) 세상을 바라본다면 당연히 AI는 나를 대체할 거라 생각할 테다.
하지만 세상을 오로지 제로섬 게임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윈-윈 게임 (파이를 더 키우는 시스템 혹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파이를 생성해 내는 시스템)을 하면 되지 않을까?
3.
AI로 인해 유능함은 더 이상 인간의 고유영역이 되지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AI로 인해 많은 것들이 보조 및 대체되고 있다. 패턴을 학습하고 기존 데이터를 조합하는 데 인간보다 유능하기 때문에, Ai를 활용하면 인간은 본인의 기존 유능함 및 실력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생각하고, 분석하고, 만들고, 이해한다.
언어로 기반이 된 모든 것들은 AI가 학습가능하다.
소프트웨어도 언어(코딩)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로봇 소프트웨어를 통해 (현재 진행형이지만) 휴머노이드 로봇이 노동일도 가담할 수 있게 된다
제로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AI로 인한 인류 종말이라며 좌절감이 올 수도 있다.
반대로 윈윈게임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새로운 창구가 열린다.
시간을 뒤로 되돌릴 수는 없다. 인류는 계속해서 발전해야 하는 순리라는 궤도에 있다. 이 궤도에서 탈피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미래는 좋든 싫든 AI와 함께하는 미래다. 그 누구도 스마트폰 전 시대, 인터넷 전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윈윈 게임은 기존의 프레임 유능함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떠한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풀 것인가 하는 능력은 유능함보다 유일함에 더 가깝다. 독창적인 사고와 시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Ai가 창조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는 있다. 시를 쓴다든지, 음악을 작곡한다든지 등. 하지만 이러한 행위나 결과물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철학을 담고 있지는 않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미래엔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AI가 인간처럼 스스로에게 존재의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턴 인간과 AI의 차이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처럼 말이다 (혹여나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부턴 실질적으로 인간과 AI의 차이를 두어야 할 이유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과거보다 현재 오늘날엔 끊임없는 자기 실험과 도전을 하는 게 매우 중요해질 거라는 생각을 한다. 앞으로는 단순한 유능함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이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나만의 독창적인 가치'를 만드는 능력의 코어는 바로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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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is a muscle" - Naval Ravikant
"정신은 근육이다" - 나발 라비칸트
우리의 생각과 사고는 근육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운동을 꾸준히 해야 근육량이 늘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도 계속해서 운동시켜줘야 한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사고와 튼튼한 철학 및 가치관을 만들기에 가장 효과적인 건 바로 문학을 읽는 거다. 평균 책값이 2만 원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미국에서는 $20), 문학책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고 유일함이라는 3차원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것만큼 가성비가 좋은 게 있을까 싶다.
물론 there's no free lunch.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문학은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자기 계발서만큼 쉽고 빠르게 읽히지 않는 다. 대부분 책 장수도 많고, 읽고 나서도 뭔 소린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문학대신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 되지 않냐라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절대.
자기 계발서와 문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무엇을 제공해 주느냐다: 답 vs 질문.
자기 계발서는 답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방법으로 알려준다. 매우 친절하게. 마치 저자가 숟가락에 밥과 반찬과 고기를 아주 정갈하고 맛깔나게 얹어서 내 입에 넣어주려고 대기 타는 것 같다.
웬만한 자기 계발서는 비교적 빨리 후루룩 읽게 된다.
하지만 문학은 독자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 근데 질문도 대놓고 던지는 게 아니라 빙빙 돌려서 말한다던지, 매우 은유적으로 한다던지, 아니면 너무 미묘하게 메시지를 전달해서 깊게 곱씹지 않는 한 손쉽게 놓칠 때도 많다. 읽는 행위 자체도 훨씬 어렵고 비효율적으로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럼에도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질문이 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던지는 질문들은 작은 질문들이 아닌 우리 삶에 정말 큰 비중을 갖는 것들이다. The big questions.
삶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가?
나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내 인생을 1000번 다 다르게 살 수 있다 가정한다면, 그중 999번은 변하지 않을 나만의 불변값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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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이중성, 삶의 의미, 변하지 않는 가치관 등 깊은 사고를 유발하는 물음표를 던진다. 하지만 문학이 좀 골치 아프고 대중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시원하게 답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사실 이런 질문들은 애초부터 정답이란 없는 질문들이다.
문학이 묻는 인간과 삶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 대답하다 보면 자기만의 독창적인 사고를 구축하게 된다. 본질을 관통하는 사고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한 시야를 넓히고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즉 문학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용기 및 나침반이 되어준다.
현재 세대는 예전에 비해 '먹고사는 문제'는 그만큼 중요해지지 않았다. 삶의 질이 나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대신 그로 인해 사치라는 게 생겨 본인의 욕망이 현재 본인의 상황에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괴리감 및 패배감으로 살기 힘들다고 여길순 있으나 인간이란 동물의 본질적인 '생존'과는 다른 결이다.
이제는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너무 빨리 발전하고 변해가는 현재 세상 속에서 흔들림 없이 나의 중요한 가치관과 나의 독창적인 사고를 굳건히 지켜야 할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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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만 봐도 우리는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 소셜 미디어와 뉴스 알고리즘에 얽매어 살아간다. 특히 각각 유저들에게 맞춤형 정보만 제공이 되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다 보니 다각적인 사고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그 어떠한 플랫폼과 심지어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에선 에코챔버(echo chamber)라고 부르는데, 알고리즘으로 인해 자기와 비슷한 사고를 가진 타인들하고만 온라인상에서 교류하다 보니 나머지 세상 사람들도 자기네들과 비슷한 가치관 및 사고를 할 거라는 큰 착각을 한다.
이것에 가장 큰 예시는 최근 미국 대선이었다. 민주당 democratic인 사람들은 본인들의 피드에 해리스의 우세에 계속해서 노출되었고 모두 당연히 해리스가 될 거라 굳게 믿었고, 대선 직후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트럼프 서포터가 많은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사실 우파에 가까운 커뮤니티나 뉴스를 보면 트럼프 지지자가 얼마나 많은 지 알 수 있다.
더 최악인 건 짧고 자극적인 정보 (틱톡, 숏폼, 릴스)등에 익숙해지다 보니 시간을 써야 하는 깊이 있는 사고가 전 연령을 포함해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에너지가 덜 필요로 한 흑과 백 논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특정 사건/사고를 바라볼 때 한 발자국 물러나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능력 또한 온라인 및 오프라인에서 찾기 힘들어졌다. 또는 자극적인 정보 혹은 AI가 만들어준 정확하지 않는 답변을 스스로 고민하거나 검증하지 않은 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5-2.
인터넷과 정보시대로 넘어오면서 이공계가 인문학보다 보상이 높고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쥐다 보니 STEM 중심의 교육이 더 강화되고 선호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도덕적 가치'보다 '경제적 성공' 및 '혁신적인 기술'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현재 미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술을 만들어내는 나라인 미국. 많은 테크업계의 리더들이 윤리적인 문제는 무시하거나 혹은 시간 및 압박 (투자자들에게)에 쫓겨 나중의 일로 내던져버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제품을 만들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밤낮을 세며 미친 듯이 개발 중이다.
기술 개발의 주요 목적이 과연 '더 나은 인간 사회'인 것인지 아니면 '더 큰 시장 점유율과 수익'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우리 각각의 판단이지만, 이젠 그러한 판단 조차 하기 힘들게 세상이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수박 겉 핥기 식의 흑과 백인 극단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누가 더 큰 확성기로 소리 지르고 번지르르한 말빨 및 영상편집으로 이기냐의 게임이 안타깝게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에 녹아들었다.
6.
매일 급격히 발전하고 업데이트되는 테크와 AI의 뉴스가 이젠 따라가기조차 버거울 정도가 되었다. 아직 커리어 초창기인 20-30대들에겐 AI의 뉴스가 불안함을 부추기도 한다.
그렇기에 오늘날엔 더더욱 독창적인 마인드셋과 자기만의 유일함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제로섬게임이 아닌 윈윈게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에게 필요로한 가치를 줄수있게.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장착하기에 가장 가성비 있고 효과적인 방법은 문학을 읽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우린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 인간관계,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비판적인 사고 능력과 철학, 윤리적인 마인드 그리고 인류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특히 AI의 등장으로 인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관습, 관례, 사회적 시스템에 질문을 하며 본질을 꿰뚫는 사고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이러한 사고능력은 자연스럽게 본인만의 유일함을 내세 울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다.
결국 이 지구에 사는 모든 개개인들은 장기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지속가능하길 바라고 해가 거듭할수록 더 나은 세상이 되길 바라는 소망을 갖고 있다 생각한다. 그 누구도 앞으로 본인이 속한 미래가 예전 석기시대처럼 비효율적이고 미개한 문명으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는 다.
딱 한번 살 수 있는 이 삶에서 특히 이제 AI와 공존하는 삶에서는 유능함보단 유일함으로, 세상에, 사회에, 타인에게, 가치를 창출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게 가장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인간다운 투자가 아닐까?